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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비상한 천재가 비상한 최후를 맞기까지

[TV 리뷰] tvN <벌거벗은 한국사>

23.02.02 14:35최종업데이트23.02.02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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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N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tvN
 
'비상한 재주를 갖고,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한 공도 못 세우고, 비상하게 죽어, 하늘나라로 갔다.(嗚呼, 抱非常之才. 遇非常之時, 無非常之功, 有非常之死)', 뭔가 욕인지 칭찬인지, 애도인지 저격인지 모를 미묘한 평가다. 바로 구한말의 풍운아 김옥균(1851-1894)의 묘비명에서 그의 인생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 추모글이다.
 
김옥균은 조선의 근대화를 꿈꾼 '혁명가'에서, 결과적으로 성급하고 경솔한 판단으로 '3일 천하' 만에 몰락한 야심가까지, 극과 극의 평가가 공존한다. 2월 1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예능 <벌거벗은 한국사> 41회에서는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은 왜 능지처참을 당했나' 편을 통하여 김옥균 일대기와 구한말의 시대적 격랑을 조명했다.
 
1884년 10월 17일,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들은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다. 개화파들은 우정총국 개국 축하를 기념하여 각국 외교관들이 모인 연회장에서 난을 일으켰다. 연회 도중 화재가 일어나고 우영사 민영익이 괴한에게 습격을 당한다. 창덕궁에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실종되어 자취를 감췄다.
 
정변에 가담한 개화파들은 모두 고위관료였고 20대 초반에서 30대 중반에 불과한 젊은 나이였다.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던 젊은 청년들은 왜 굳이 쿠데타를 일으켰을까. 이들은 개화사상(서양의 근대적 제도를 받아들여 조선의 제도를 변화시키려는 사상)을 주장한 세력으로 서구식 근대화를 통하여 조선을 더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야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당시 군주였던 고종은 근대화를 통하여 자주적인 조선을 만들고자 하는 큰 방향에서 개화파와 입장이 일치했다. 정변 5인방은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측근 세력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개화의 속도와 방식에서 의견차이를 드러냈다.
 
흥선대원군 집권시기까지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조선은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의 친정과 민씨 세도정치기로 접어들며 거부할 수 없는 개항의 물결에 휘말렸다. 1876년 일본의 침입으로 이루어진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조선은 어쩔 수 없이 개항을 받아들였고 이어 세계열강들과도 차례로 수교를 맺었다. 일본, 미국, 러시아, 청나라 등 세계 열강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륙과 해양을 잇는 요충지인 조선을 식민지화하여 장악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고종 역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대한 위기의식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고종은 조선도 빨리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군사적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를 위하여 고종은 김옥균같이 개화에 적극적인 젊은 신진관료들을 중용하고 1880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근대화 정책을 주도하게 됐다. 통리기무아문을 통하여 신식군대인 별기군이 창설되기도 했다.
 
고종은 1881년 김옥균을 일본에 파견하여 해외의 선진문물을 보고 배워올 것을 지시한다. 김옥균은 도쿄와 나가사키에서 일본의 조선소-제련소-탄광 등을 둘러보며 기계화로 발전된 문물에 놀랐고, 천황중심의 입헌군주제를 통하여 근대화를 이뤄낸 일본의 현실에 큰 감명을 받았다. 김옥균은 일본의 정치가-사상가들과 교류하여 깊은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김옥균은 귀국길에 충격적인 사건을 접해듣는다. 1882년 벌어진 '임오군란'으로 구식 군대가 신식 군대와의 차별대우와 군납비리에 분노하여 난을 일으킨 것, 반군인 구식군은 일본 공사와 조정 관료들을 살해하고 궁궐을 습격하여 장악했다. 구식군은 자신들을 차별하던 집권세력인 명성왕후와 여흥 민씨일족을 제거하고 고종을 폐위시킨 뒤 새로운 정권을 만들려고 했다. 그리고 구식군이 추대한 인물은 바로 흥선대원군이었다.
 
정치의 중심으로 복귀한 대원군은 고종의 개화정책을 폐기하고 모든 정책을 되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이는 조선에 더 큰 재앙을 불러왔다. 청나라와 일본은 각기 반란 진압과 문책을 내세워 군대를 조선에 파견했다. 특히 청나라는 배후 주동자라는 이유로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자국으로 연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청군은 임오군란을 진압했지만 이후로도 본국으로 복귀하지 않고 조선에 주둔했고, 한동안 대원군을 볼모로 조선의 정치에 간섭했다.
 
이를 모두 지켜본 김옥균은 청나라에 대한 깊은 반감을 품게 됐다. 여기에 일본도 임오군란에 대한 피해보상과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겠다고 선언한다. 이는 일본이 과거 서양 열강에 의하여 강제로 개항을 당하며 겪었던 수법을 조선에 그대로 써먹은 것이기도 했다 .
 
김옥균은 일본과 맺은 제물포조약의 후속 조치로 인하여 조선이 파견한 사죄 사절단으로 다시 일본을 방문하게 됐다. 그런데 당시 김옥균은 일본에 차관(국가간에 돈을 빌리는 것)을 빌리는 밀명을 받은 상태이기도 했다.
 
고종과 개회파는 왜 조선에 침략야욕을 드러내던 일본에 손을 내밀었을까. 홍문기 총신대 역사학과 교수는 "당시 조선의 급진 개화파들은 일본보다 청나라가 훨씬 더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1880년대만 해도 아직 일본의 군대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 김옥균은 '일본은 조선이 준비만 잘하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임오군란 전후로 조선 조정은 둘로 분열됐다. 온건 개화파는 친청세력, 급진 개화파는 친일세력에 가까웠다. 하지만 친청세력이 득세한 조정에서 김옥균의 입지는 점점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는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이라는 불평등 통상조약을 맺으며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한다. 여기서 청나라는 속방(屬邦)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조선을 청나라의 지배를 받는 속국으로 정의했다. 전통적으로 청나라는 주변국들과 조공관계를 유지해왔지만 과도한 내정간섭은 어느 정도 자제했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청나라가 서양 열강들에게 침탈당하여 국력이 약화되면서, 청나라 역시 주변의 약소국들을 식민지적 정책으로 압박하기 시작한다. 전형적인 폭력의 학습효과이자 대물림 현상이다.
 
분노한 김옥균은 '조선개혁의전서'에 남긴 글에서 "청의 굴레를 철퇴하고 독립하여 완전 자주국을 수립하는 일"을 목표로 제시한다. 김옥균은 군대 양성과 도로 정비 등 각종 근대화 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지만, 친청세력들의 지속적인 견제와 방해로 번번이 한계에 부딪혔다.
 
김옥균과 급진 개화파는 결국 조선의 진정한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변을 통하여 친청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1884년 베트남에서 발발한 '청불전쟁(청나라 vs. 프랑스)'으로 조선에 주둔하던 청군들의 반수 이상이 철군하자, 김옥균은 이를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게 된다.
 
김옥균이 파트너로 손을 내민 것은 일본이었다. 김옥균은 차관 도입 실패 이후로도 여전히 일본 정계 인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 공사는 김옥균의 쿠데타 계획을 듣고 신식군대 백여 명을 지원해주기로 약속했다. 일본도 조선에서의 패권 경쟁을 위하여 청나라를 몰아내야 한다는 데서 김옥균과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김옥균이 이끄는 급진개화파는 우정총국과 일본 공사관을 거쳐 창덕궁으로 이동하여 고종의 신병을 확보했다. 고종은 이때까지만 해도 김옥균이 정변을 일으켰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급진개화파는 고종을 경우궁으로 이동시키고 온건개화파 대신들을 불러들여 무참하게 살육했다. 충격을 받은 고종이 거듭 "죽이지 말라"는 전교를 내렸으나 청나라와 친청파에 대한 증오심이 극에 달했던 정변세력은 왕의 지시마저 무시했다.

김옥균과 정변세력은 이후 내각인사 임명안을 발표하여 국가의 주요 요직을 전부 장악했다. 3일 차에는 개혁정강을 발표하여 개화당이 표방하는 개혁정책의 지침을 공개했다. 여기에는 청나라에 잡혀간 흥선대원군의 귀환, 청과의 조공관계 폐지 등의 조항이 담겨있었다. 개화파가 정치적 입장에서 반대되는 보수세력의 상징인 대원군의 송환까지 요구한 것은, 그만큼 조선을 청국의 간섭을 받지 않은 자주적인 국가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었다.
 
심지어 개혁정강에는 대신들이 군주인 고종없이 회의를 진행하고 법령을 시행하겠다는 놀라운 내용도 담겨있었다. 전제군주국가였던 조선에서는 이전까지 상상도 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김옥균과 개화파들을 아꼈던 고종에게는 배신감이 느껴졌을 만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김옥균이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일본 공사에게 창덕궁으로 돌아가겠다고 요구한 것. 일본은 이미 정변이 성공했고 청나라가 개입할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고종의 요구를 들어주고 환심을 사려고 했다.
 
하지만 이는 오판이었다. 환궁한 고종과 명성황후는 비밀리에 청군에 연락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정변 3일 차에 1500명에 이르는 청군이 창덕궁을 습격하며 정변 세력과 큰 전투가 벌어진다. 여기에 김옥균과 정변세력을 신뢰하지 않았던 조선군의 다수가 청군에 가담했고, 믿었던 일본군마저 청과 퇴로를 보장한다는 비밀거래를 맺고 퇴각해버리며,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10월 19일, 갑신정변은 그렇게 3일 만에 실패로 막을 내렸다.
 
김옥균과 정변세력들은 10월 26일, 일본으로 도주했다. 일본은 김옥균의 망명을 받아줬다. 조선침략의 야욕을 간직한 일본은 미래를 대비하여 협력자들이 필요하다는 정치적 판단에서 김옥균과 정변세력을 수용한 것.
 
김옥균은 이후 10년 가까이 일본에 머물면서 조선의 근대화에 대한 고민을 이어갔지만 뚜렷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일본은 김옥균으로 인하여 조선과 외교적 갈등이 깊어지자 계륵이 된 김옥균을 섬으로 유배시키려고 했다. 갈 곳이 없었던 김옥균은 결국 그토록 증오했던 청나라에서 희망을 찾기 위하여 1894년 2월 상하이로 떠났다.
 
하지만 김옥균은 그해 2월 22일 상하이의 한 호텔에서 동행자였던 홍종우에게 암살된다. 홍종우의 정체는 고종과 명성황후 세력이 보낸 자객이었다. 고종은 10년 넘게 김옥균의 행적을 주시해왔고, 홍종우는 서양문물에 관심이 많은 김옥균에게 유학생을 가장하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김옥균은 홍종우가 쏜 총에 머리와 가슴을 맞고 즉사했다. 그의 나이 향년 44세였다.
 
청나라는 김옥균의 시신을 조선으로 보냈다. 고종은 김옥균의 시신을 여러 조각으로 찢는 잔혹한 능지처참형을 내리고 머리는 '대역부도옥균'이라는 글귀와 함께 장대에 매말려 효수된다. 김옥균에 대한 고종의 배신감과 분노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라는 대의에서 출발한 김옥균의 노력은 결국 비참한 결말로 끝을 맺었다. 그가 일으킨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내세우면서도 일본이라는 외세의 힘에 의지한 모순과 내로남불을 지적한다. 반면,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근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정치개혁이라는 점에서 나름의 역사적 의미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김옥균의 삶은, 개혁의 이상과 시대적 현실 사이에서 올바른 균형감각과 성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벌거벗은한국사 김옥균 갑신정변 급진개화파 고종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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