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심하는 벤투 감독6일(한국시간) 카타르 도하 974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16강전 대한민국과 브라질의 경기. 벤투 감독이 경기가 풀리지 않자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벤투 감독이 추구한 축구는 이른바 후방 빌드업에 기반한 '점유율 축구'였다. 어떤 팀을 상대로도 공을 소유하고 패스를 주고받으면서 주도권을 쥐는 축구를 한국 축구에 이식하겠다는 게 벤투 감독의 청사진이었다. 히딩크 시대 이후 네덜란드식 토탈사커와 압박축구에 기반하여 세계무대에서는 선수비 후역습 위주의 플레이를 추구하던 한국축구의 전통적 스타일에 변화시키겠다는 모험이었다. 다만 빌드업이라는 방식은 벤투 감독 고유의 철학이라기보다는, 유럽과 남미 등 현대축구에서 이미 보편화된 추세에 가까웠다.
벤투 감독은 무려 4년간 한국축구를 이끌면서 여러 가지 의미있는 기록을 남겼다. 벤투 감독이 지휘한 4년 4개월은 단일 재임기간으로 역대 한국 A대표팀 최장수 사령탑에 이름을 올렸다. 직전 월드컵이 끝나고 지휘봉을 잡은 대표팀 감독이 다음 월드컵 예선과 본선을 모두 완주한 사례는 벤투 감독이 사상 최초다. 또한 한국대표팀 감독으로 57경기를 소화하며 거둔 35승(13무 9패)은 역대 감독 최다승 기록이기도 하다.
벤투호는 아시아 최종예선을 2경기 남겨놓고 조기에 월드컵 진출을 확정하며 최초로 10회 연속 본선행이라는 새 역사를 썼다. 지난 두 번의 대회에서 지역예선부터 고전을 거듭하며 감독교체의 악순환을 거듭했던 것과 달리, 모처럼 안정적으로 최종예선을 돌파했고 난적으로 꼽히던 이란을 홈에서 10년 만에 꺾기도 했다.
또한 본선에서는 포르투갈-우루과이-가나 등 각 대륙의 강호들과 함께 편성되어 쉽지 않다고 평가받은 H조에서 1승 1무 1패라는 성적을 거두며, 한국축구 역대 3번째이자 외국인 감독 최초의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성과를 이뤄냈다. 특히 앞선 2경기에서 1무 1패를 기록하며 벼랑 끝에서 맞이한 포르투갈과의 조별리그 최종전에서는 벤투 감독이 전 경기의 퇴장 여파로 벤치를 비운 공백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2-1 역전승을 거두며 한국축구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16강 진출이라는 명장면을 연출했다.
하지만 4년의 시간동안 벤투 축구는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남겼다. 부임한 지 5개월만에 치러진 2019 아시안컵에서는 카타르와의 8강전에서 패하여 반세기 만의 우승도전이 좌절됐다. 라이벌 일본에게 사상 최초로 2회 연속 한일전 세 골 차 참패를 기록하며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팬들에게 공식사과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본선 진출 확정 이후 평가전에서 수비불안과 기대에 못 미친 경기력이 이어지며, 과연 벤투 감독의 점유율 축구가 월드컵과 세계무대에서 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부호도 늘어났다.
벤투 감독은 체계적인 훈련프로그램과 선수단 장악능력으로 선수들에게는 신뢰를 얻었다. 반면 점유율축구에 대한 과도한 맹신, 보수적인 팀운영과 선수선발, 경직된 소통 등으로 팬들과 언론에게는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다행히 벤투호는 12년 만의 16강 진출을 이뤄내며 해피엔딩으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
사실 어떤 명장이라도 결코 완벽할 수는 없다. 누구나 공과가 있기 마련이고 벤투 감독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록 16강이라는 성과를 이뤄냈지만 그것이 과연 벤투 감독의 철학이 모두 옳았음을 증명했는지는 신중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번 대회에서 한국이 기록한 5골 중 벤투가 강조한 빌드업과 점유율 축구를 통하여 만들어낸 득점은 사실상 단 한 골도 없다. 벤투호의 고질병인 수비불안과 얇은 스쿼드의 문제는 월드컵에서도 끝내 개선되지 않았고, 일본이나 브라질 등 일정 수준 이상의 강팀을 상대로는 통하지 않는다는 점유율 축구의 약점도 드러냈다.
겉보기에 공을 오래 소유하고 주도하는 것은 보기에는 훌륭해보일지 몰라도, 실제로 점유율은 이번 월드컵에서 숫자놀음에 불과했음이 드러난 사례는 숱하게 많다. 한국만 해도 가나전에서 경기 초반 압도적인 파상공세와 볼점유율에도 불구하고 가나의 유효슈팅 3개가 모두 실점으로 이어지는 '철퇴축구'에 제대로 당했다. 반대로 포르투갈전에서는 점유율에서는 크게 밀리고도 오히려 한국축구의 전통적인 강점인 세트피스와 역습으로 만들어낸 2골로 역전승을 거뒀다.
퇴장당한 벤투 감독은 유일하게 승리한 포르투갈전에서 관중석을 지키며 정작 경기에는 어떤 관여도 하지 못했다. 그것도 가나가 우루과이에게 2골 차로 패하고도 동반탈락을 감수하며 물고 늘어져준 물귀신 작전 덕분에 자력 외의 행운까지 따라준 결과였다.
오히려 한국보다 앞서 점유율축구를 추구했던 일본은 기존의 스타일을 버리고 선수비 후역습의 실리축구로 강호 독일과 스페인을 잡고 조 1위에 오른 것도 좋은 비교대상이 된다. 점유율과 능동성이란 게 축구에서 승리를 추구하기 위한 여러 가지 수단의 하나일뿐, 반드시 무조건적인 정답은 아님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는 벤투 감독이 카타르월드컵을 끝으로 물러나면서 이후의 한국축구가 나아가야할 '방향성'의 문제와도 관련이 되어 있다. 한국축구는 앞으로도 벤투 감독이 남긴 점유율 축구의 유산을 계속 유지하면서 발전시키는 방향을 택할 것인지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
만일 벤투 감독과 전혀 철학이 다른 새로운 감독이 지휘봉을 잡게 될 경우 한국축구는 또다시 새롭게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벤투가 제시한 경기를 주도하고 지배하는 능동적인 축구의 틀은 지켜가되, 압박과 역습, 스피드라는 한국축구의 전통적인 강점들을 유연하게 조화시킬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야한다.
한편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벤투 감독이 4년간 한국대표팀을 이끌면서 어쨌든 일관된 소신과 철학을 바탕으로 팀을 운영해온 뚝심, 투박한 한국축구에 능동적인 점유율 축구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은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쓰는 선수만 쓴다', '잘하는 K리거를 외면한다'는 지적도 종종 받았지만, 결국 벤투가 발탁하고 꾸준히 중용한 조규성, 백승호, 나상호 등은 월드컵에서도 대부분 자신의 몫을 해내며 벤투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또한 그동안 전혀 쓰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최고의 유망주' 이강인도 월드컵을 앞두고 과감하게 발탁해 대회 최고의 조커로 요긴하게 활용하며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다. 월드컵 무대에서 그간의 고집을 꺾고 조금이나 유연한 변화를 보여준 벤투 감독의 용기는 '신의 한 수'로 이어졌다.
그리고 벤투호가 완주할 수 있었던 데는 축구협회의 믿음과 지원이 있었다. 그동안 월드컵마다 반복되던 감독교체의 악순환을 탈피하여, 여러 차례의 위기 상황과 각종 비난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벤투의 철학을 믿고 보호하며 4년 동행을 성공적으로 완주했다는 경험과 연속성은, 앞으로의 한국축구에 있어서 귀중한 선례로 남을 것이다.
벤투호의 4년은 16강이라는 선물과 함께 한국축구에 새로운 희망과 과제를 동시에 남겼다. 그 유산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지키고 발전시킬 수 있느냐는 이제 새로운 대표팀 감독과 한국축구의 몫으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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