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라 토레-팔코니-그라시, 마피아에 맞섰던 정의로운 사람들

[TV 리뷰] tvN 예능 <벌거벗은 세계사>

22.11.23 15:06최종업데이트22.11.23 15:06
원고료로 응원
마피아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거대한 범죄조직중 하나다. 보호비 갈취, 불법 거래, 마약업 등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마피아는 <대부> <스카페이스> <언터처블> 등 수많은 걸작 범죄영화들의 소재가 되기도 했고, 현대 사회 곳곳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대중문화속에서 때로 멋지고 폼나게 미화된 것과 달리, 현실은 훨씬 더 비열하고 잔혹하다.

이탈리아의 뿌리깊은 지역적-역사적 갈등 속에서 탄생한 마피아는 서민들의 삶을 갈취하는 악랄한 범죄조직으로 출발하여 경찰이나 정부도 통제하기 어려운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지금도 완전히 청산되지 못한 뿌리깊은 국가적-세계적 문제로까지 자리잡았다. 최근 날로 지능화-거대화되고 있는 범죄 때문에 골치를 앓고있는 한국으로서도 멀리 떨어진 남의 일만은 아니다.

22일 방송된 tvN 예능 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 74회는 '이탈리아는 어떻게 마피아 제국이 되었나' 편을 통해 국제범죄조직의 대명사가 된 이탈리아 마피아의 역사를조명했다. 유럽 근현대사 전문가인 임동현 신한대학교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마피아의 등장은 곧 이탈리아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1861년 통일 이탈리아의 등장부터 지금까지 시칠리아의 주도인 팔레르모는, 곧 이탈리아 마피아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탈리아 통일과 합병은 시칠리아인들에게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탈리아 왕국은 북부 지역의 산업화에 힘썼지만 시칠리아는 점령지처럼 취급했다. 높은 세금, 강제 징용, 전염병인 콜레라 대유행, 무분별한 죄수 대사면 등 중앙정부의 실정이 이어지며 시칠리아는 대혼란에 빠진다. 공권력조차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진 시칠리아에서 이른바 자경단 혹은 보안관처럼 '대가를 받고 보호서비스를 제공하고'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많은 학자들은 이들이 바로 마피아의 기원으로 보는 시각이 유력하다.
 
시간이 흐르며 이들 조직은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서는 자신들의 마을을 지키고 관리하는 수준을 넘어서, 도시를 장악하는 권력집단으로 성장했다. 공동체의 공익과 공존보다는 이른바 자신들 '패밀리' 만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변질됐다. 19세기 팔레르모 영국 영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막강한 비밀결사를 구축한 마피아와 토착위원회들이 노동자들의 수입을 나눠가지고 범죄자들을 자신들의 보호 아래 은닉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1877년 이탈리아 정부의 한 보고서에는 '시칠리아에서 유일하게 번창하는 사업은 폭력'이라는 기록도 나온다.
 
시칠리아의 혼돈을 기회삼아 등장한 인물이 바로 '보스 중의 보스'로 불리우는 비토 카시오 페로(1862-1943)였다. 그는 치안을 빌미로 보호비를 걷는 것은 최초로 사업화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페로는 살인만 20건, 갈취 57건 등 총 110건에 이르는 범죄행위로 고발되었지만 놀랍게도 전부 무죄 판결을 받았다. 기소될 때마다 많은 돈을 들여서 보석으로 번번이 풀려났기 때문이었다. 또한 미국과 이탈리아를 오가면서 최초로 국제적인 마피아의 커넥션을 구축한 것도 바로 페로였다.
 
이러한 마피아의 성장에 제동을 건 인물이 아이러니하게도 이탈리아의 독재자인 베니토 무솔리니였다. 극단적인 파시스트(국가를 최우선으로 하는 파시즘 신봉자들)를 표방했던 무솔리니는, 북부와 달리 파시즘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남부에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무솔리니는 그 원인이 마피아에 있다고 판단했고, 강도 높은 마피아 척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2차세계대전은 와해 위기에 몰려썬 마피아에게 전화위복의 기회가 됐다. 전쟁에 패배한 무솔리니 정권이 몰락하면서 시칠리아는 연합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연합군 점령지 정부는 시칠리아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하여 선택한 파트너는 파시스트 정권에 대한 적대감이 가장 컸던 마피아였다.
 
또한 이탈리아는 왕정 대신 민주 공화정이 들어서며 제1공화국이 수립됐다. 1946년 이탈리아 국민총선거에서 우파인 기독교민주당은 제1당을 차지했지만, 사회당과 공산당 등 좌파계열인 제2, 3당의 지지도를 합친 것이 더 높았다. 사회-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을 막는 것을 지상과제로 내세웠던 이탈리아 우파는 마피아와 손을 잡았다. 정치세력화한 마피아는 기독교민주당과의 결탁을 통하여 반대세력에 폭탄테러를 일으켜서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했고, 부정선거에 적극 개입하기도 했다. 마피아의 지원을 바탕으로 기독교민주당은 집권에 성공한다.
 
이때부터 마피아가 정치권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뿌리깊은 커넥션이 구축되기에 이른다. 정치권의 지원을 등에 업은 마피아는, 전후 도시재건과 건설붐을 타고 각종 이권사업에 개입하여 막대한 이익을 누렸다. 이러한 마피아의 전횡은 이른바 '팔레르모 약탈(Sack of palermo)'이라 불리는, 무분별한 아파트 건축으로 지역의 역사적인 건물들까지 파괴하는 상황을 초래하기도 했다.
 
시칠리아의 마피아 조직 '코사 노스트라(Cosa Nostra, 우리들의 것)'는 이 시기에 급성장한 대표적인 조직이었다. 시칠리아 내에서 100여개의 조직들이 소속된 연합체인 코사 노스트라는 '오메르타(침묵의 계율)', '벤데타(피의 복수)' 등 엄격한 규율로도 유명했다. 마피아 조직원들은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되고, 이를 어길 경우 가족-가문-지역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이로 인하여 조직들간 서로를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나는 학살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코사 노스트라의 주요한 사업중 하나는 마약업이었다. 코사 노스트라는 미국으로 밀수되는 마약 유통사업에 중개무역상으로 가담하며 막대한 이익을 누렸다. 마피아들은 내부 대립을 막기 위하여 '시칠리아 마피아위원회'라는 중재기구를 설립하고, 이들의 주도하에 시칠리아의 마약 사업은 한층 날개를 날게 됐다. 이들은 미국에 피자가게로 위장한 유통시스템을 구축하여 이른바 '피자 커넥션'으로 불리기도 했다. 1975년부터 1984년까지 피자 커넥션을 통하여 미국에 유입된 헤로인의 규모는 16억 5천만 달러(현재 2조 3천억)에 이른다.
 
한편 마약산업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게되면서 욕심이 커진 마피아들은 그 주도권을 놓고 갈등을 빚게된다. 이른바 코사노스트라 내부에서 콜레오네와 팔레르모 패밀리 사이에 벌어진 '시칠리아 마피아 대전쟁'이 대표적이다. 팔레르모에서 약 400명이 사망하고 160명이 실종된 마피아 역사상 최악의 전쟁으로 불린다.
 
콜레오네 패밀리의 보스였던 살바토레 리나는 '야수'라는 별명으로 불릴만큼 잔혹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리나는 라이벌이었던 팔레르모 패밀리의 스테파노 본타테와 살바토레 안제릴로를 비롯한 일가족과 조직원들을 대거 살해하고 그들의 부와 권력을 빼앗았다. 또한 리나는 마피아만이 아니라 마피아를 비판한 언론인과 일반인들마저도 대거 살해하는 잔혹한 모습을 보였다.
 
리나의 만행은 이미 높아져가던 마피아에 대한 사회적 분노를 촉발시켰다. 이탈리아 공산당 서기였던 피오 라 토레는 '반마피아법'을 발의하며 최초로 이탈리아 사법체계에서 마피아를 범죄조직으로 공식 규정했고, 마피아 범죄로 이득을 얻은 이들의 소득과 재산을 압류하게 했다. 하지만 마피아와 결탁한 기민당의 제지로 반마피아법은 2년동안 제정되지 못했고, 눈에 가시였던 피오 라 토레는 1982년 4월, 마피아에게 살해되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라 토레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이탈리아 정부는 그해 9월 반마피아법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궁지에 몰린 코사 노스트라는 검찰과 경찰의 고위간부들을 상대로 테러와 학살을 연이어 저지르며 저항했다.
 
위협에 굴하지않고 마피아와의 전쟁에 앞장선 정의로운 이들은 라 토레만이 아니었다. 마피아 수사를 지휘한 조반니 팔코네와 파올로 보르셀리노는 지금도 '이탈리아의 영웅'으로 불리는 유명한 검사들이다. 1985년 두 검사가 포함된 팔레르모 검사팀은 무려 475명의 마피아단원에 대한 기소장을 완성한다.
 
살바토레 리나의 최대 정적이었던 팔레르모 패밀리의 보스 토마소 부쉐타는 마피아들간 '침묵의 계율'을 깨고 검찰에 협조한다. 부세타는 마피아 대전쟁으로 수많은 가족과 지인을 잃고 마피아 생활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리나는 수사가 진행중이던 1984년 12월 나폴리에서 밀라노로 향하던 열차를 폭파시키는 민간인 테러로 17명이 사망하고 260여명이 중경상을 입는 '크리스마스 대학살'을 벌였다. 부쉐타와 검찰에 보내는 리나의 경고메시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사 노스트라를 향한 수사는 멈추지않았다. 1986년부터 92년까지 열린 '막시 재판'은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큰 마피아 처벌 재판으로 불린다. 이탈리아 정부는 마피아들의 테러와 방해를 막기 위하여 강화 콘크리트와 방어 시설을 구축한 새 재판정까지 건설했다. 피고 475명 중 부재중 기소자를 제외한 300여 명이 철창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았고 변호인단만 200여 명, 검찰측이 준비한 서류는 약 40만 페이지에 이르는 세기의 재판이었다.
 
막시 재판을 통하여 마피아가 그동안 벌인 각종 살인과 마약 밀매, 폭력과 협박에 의한 강요 혐의 등이 유죄로 인정됐다. 피고 475명 중 344명에 내린 징역 합계만 2,665년에 이른다. 그중 죄가 무거웠던 보스급 19명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됐다.
 
재판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또다른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1992년 5월, 마피아 수사를 이끌었던 팔코네 검사 부부와 경호 경찰 3인이 도로에서 폭탄테러로 사망했다. 또한 팔코네 검사가 세상을 떠난지 두 달 만에는 보르셀리노 검사마저 마피아의 폭탄테러로 목숨을 잃었다. 팔코네 검사는 생전에 자신도 이미 마피아의 손에 죽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매일매일을 불안과 공포 속에 살아야했던 일화가 공개되어 안타까움을 더했다.
 
마피아는 관련 검사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으로 일을 해결할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이는 심각한 오판이었다. 오히려 마피아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알게된 이탈리아 국민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국민들은 정의로운 두 검사를 보호하지 못한 무능한 정부를 성토했다. 팔레르모 공항은 두 검사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팔코네-보르셀리노 공항으로 명명됐다. 시민들은 "팔레르모는 정의를 원한다. 정부는 마피아를 몰아내라"고 요구하며 평화시위를 벌였다.
 
1993년, 이 모든 비극의 중심에 있던 살바토레 리나가 23년 만에 마침내 체포된다. 리나는 재판정에서 "저희 가족은 올바른 도덕성으로 이 나라에서 살아왔다"고 주장하며 모든 혐의를 부인하는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다. 대질신문을 거부했던 토마스 부쉐타가 증인으로 출석하여 그의 범죄를 세세하게 증언하며 "마피아는 끝났습니다"라고 발언하자, 리나는 섬뜩한 표정으로 노려보다가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수많은 희생 끝에 체포된 리나는 결국 52건의 간접 살인 혐의가 인정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코사 노스트라는 이후 쇠락의 길을 걸었지만 이탈리아에는 아직 남은 과제가 있었다. 바로 마피아와 결탁하여 부패할 대로 부패해버린 정치권의 개혁이었다. 밀라노 검찰청의 젊은 검사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 검사가 당시 연정에 참여중이던 사회당 소속의 관리를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한 것을 시작으로, 이탈리아에 반부패수사인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 이탈리아 정부의 부정부패 척결작업)'의 바람이 일어난다.
 
수사 1년만에 천여명의 정치인이 체포되었고 국회의원의 25%인 177명이 검찰수사를 받았다. 이후로도 수사는 계속 확대되어 정치권에서 부패 관련으로 수사를 받은 이만 6천여 명, 체포된 이는 2993명에 이르렀다. 이중 상당수의 정치인이 마피아와 결탁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여기에는 전직 총리는 베티노 크락시, 줄리오 안드레오티 등도 포함되어있어서 이탈리아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또한 1994년 1월에는 마피아와 오랫동안 결탁해온 기독교민주당이 의원의 절반이 기소되면서 전격 해산을 선언하는 등 이탈리아 정치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로써 제1공화국이 무너지고 제2공화국이 들어서는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막시 재판과 마니 풀리테도 마피아를 완전히 척결하지는 못했다. 살아남은 마피아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합법적인 경제 영역에 진출하며 재기를 노렸다. 이탈리아 남부에 새롭게 등장한 카모라와 은드랑게타는 합법화된 사업에 다양한 진출하여 거대 범죄조직으로 성장했다.
 
현대 마피아들은 기업화된 조직을 바탕으로 각종 산업에 진출하고 있다. 농업 분야에서 진출하여 경기침체로 가격이 떨어진 농장을 사들여 불법 이주민들을 착취하여 수익을 창출하는 '아그로 마피아(이탈리아어로 농업, 마피아를 합성한 신조어)'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또한 마피아는 기후문제가 세계적인 이슈가 되면서 풍력산업 등 친환경과 관련된 에너지 분야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했다. 이들을 '에코 마피아'라고 부른다.
 
아무리 시대에 맞춰서 옷을 바꿔입었다고 해도 그들의 본질이 범죄자라는 것은 바뀌지않는다. 마피아의 시작부터 함께했던 이른바 피쪼(Pizzo)로 불리우는 보호비 명목으로 약자와 시민들을 착취하는 관행은 여전하다. 현재 시칠리아 팔레르모 지역에서 거둬들이는 보호비만 매년 1억 7천만 달러(약 2250억 원)에 이르며 시칠리아 전역으로 확장하면 17억 달러(2조 3천억)에 이른다. 이를 거부하는 이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보복을 당하기 일쑤다.
 
1991년 팔레르모에서 의류공장을 운영하는 평범한 시민 리베로 그라시는 지역언론에 공개항의서한을 보내 보호비를 거부할 것을 선언했다. 그라시는 각종 협박과 보복을 당했지만 굴하지않고 "누군가는 저처럼 행동하면, 마피아에 의하여 사업체가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저처럼 행동한다면 사업체들이 아니라 마피아의 착취가 무너질 것"이라는 명언을 남기며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라시는 공개서한을 보낸지 1년도 되지 않아 끝내 마피아에 의하여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탈리아 언론들은 "마피아가 영웅을 죽였다"며 그라시의 죽음을 애도했다.

2022년 7월까지 이탈리아에서 집계된 통계에 따르면 마피아에 희생된 민간의 숫자는 1008명에 이른다. 이탈리아 정부는 2017년부터 3월 21일을 '마피아 희생자의 날'로 지정하여 안타까운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다. 정의를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생당한 선구자들의 노력으로 이탈리아 정부와 시민들은 이전보다 용기있게 마피아의 횡포에 맞서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마피아와의 전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2021년, 은드랑게타를 겨냥한 세기의 재판이 시작되어 그 향방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이처럼 이탈리아 사회에서 마피아는 단순한 경제적 이익을 위한 범죄-폭력집단 이전에, 이탈리아만의 독특한 역사발전 과정이 낳은 역사적 산물이라고도 볼수 있다. 사회적 통합을 제대로 이루지못한 국가가 어떤 위기와 댓가를 치러야하는지 돌아봐야한다는 교훈을 남긴다.
 
마피아와 싸우다가 순직한 조반니 팔코네 검사는 "마피아는 이길수 없는 대상이 아니다. 마피아는 인간이 만든 것이고, 인간이 만든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시작도 있고 끝도 있을 것이다"라는 어록을 남겼다. 우리에게도 역시 굴곡의 역사를 거치며 어떤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않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하여 앞장서서 투쟁한 정의로운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현재가 있었던 것처럼.
벌거벗은세계사 마피아 이탈리아역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