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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분노만... '어른' 동석이 그래선 안됐다

[TV 리뷰]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22.06.11 11:03최종업데이트22.06.11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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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의 한 장면. ⓒ tvN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다, 어린 동석(이병헌)이 엄마에게 귀싸대기를 맞는 장면에서, 나는 내 뺨을 어루만졌다. 예닐곱 살쯤이었나, 나도 엄마에게 저렇게 귀싸대기를 맞은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얼마나 아팠었나? 볼의 통각은 가물가물하다. 한 세월이 지났으니까. 그래도 그때 얼마나 놀랐던지, 얼마나 서러웠던지는 지금도 생생하다. 상처란 이런 것이다. 사라지지 않고 불쑥 다시 그 순간에 붙들리는 것.
 
당시(1960~1970년 대) 엄마들은 좀 사나웠다. 자식을 매로 훈육하는 것이 비난받는 세상이 아니었으니까. 내 엄마도 참다 참다 성이 나면, 손에 잡히는 게 바로 매가 되곤 했다. 비, 총채, 어떤 땐 연탄집게마저. 그땐 많이들 그랬다. 당시엔 '우리 엄만 왜 저럴까' 서러울 때도 많았지만, 각박한 시대를 살았던 엄마들도 실은 상처투성이였다. 자식들 입히고, 먹이고, 가르치는 게 무서울 때라, 마음 따위는 들여다볼 틈이 없었다.
 
옥동과 나의 엄마

남편이 죽자 가난한 옥동(김혜자)은 살 일이 아득했을 것이다. 제주 여자는 강인하고 생활력이 강하지만, 모두 해녀가 되어 살림을 맵짜게 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질도 못하는데, 아이들하고 살아갈 최소한의 가산도 남기지 못한 채 남편이 죽었다는 현실은, 옥동에겐 사형선고를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살아갈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옥동은 열 살에 고아가 되었다. 어린 고아 여자아이에게 세상은 친절한 곳이었을까? 어린 옥동이 전후 각박해진 세상을 부모도 없이 살아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전쟁보다 더 엄혹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어쩌다 제주 남자와 결혼했고, 가족을 만들어 울타리를 치고서야 비로소 조금, 온 천지에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것 같은 정신적 고아 상태와 멀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은 다시 옥동을 찾아들었고, 남편의 죽음과 함께 겨우 세운 울타리도 부서져버렸다. 다시 정신적 고아가 되어 무서운 삶의 무게를 홀로 감당해야 했던 '과부'에게 가족을 부양해 주겠다는 약속은, 비록 첩이 되는 일일지라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가장인 자신을 섬기는 것은 물론이고, 식물인간인 본처의 병수발에 장대 같은 전처소생 두 아들까지 살뜰히 보살피라는 제안은 사실상 동석을 보살펴준다고 해도 터무니없이 밑지는 거래지만, 경제적 능력이 없는 옥동에겐 그마저도 거부할 수 없는 피난처였다. 가난은 이토록 혼자된 여자에게 가혹한 것이다.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의 한 장면. ⓒ tvN

 
내 엄마는 '피난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피난민이었다고 한다. 혐오와 차별과 배제의 대상을 손가락질하는 말, 피난민. 엄마도 전쟁이 터지기 전에는 호령깨나 하고 살던 비옥한 철원평야 지주의 딸이었지만, 밤이고 낮이고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폭격에 지주면 뭣하고 머슴이면 뭣했겠나. 모든 걸 다 잃고 겨우 세 식구 목숨 하나 건져 삼팔선을 넘었다고 한다. 그렇게 '피난민'이 되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인품이나 기량이나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이미 노쇠한데다 전쟁으로 인한 과도한 스트레스와 건강 악화로 부양의 능력을 상실했다. 어린 엄마에겐(엄마는 늦둥이 외동딸이었다) 가엾은 늙은 부모를 부양하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그러니 부모를 봉양하게 해준다는 재취 자리는 얼마나 혹하는 제안이었겠는가.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를 봉양해 준다는 약속은 공수표였다. 엄마에겐 전쟁보다 가혹한 시절이었다.
 
엄마의 과거는 부끄러울 것이 전혀 아니지만, 철없는 어릴 때는 친구들에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가족사는 아니었다. 그리고 유독 오빠는 이 가족사를 못 견뎌했다. 이로 인해 오빠는 청소년기 엄마 속을 꽤 썩였고, 성인이 되고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엄마의 선택이 자식들에게 회복할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면, 딸들에게도 그랬어야 한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딸 셋은 이런 일로 한 번도 엄마 속을 헤집지 않았다.
 
어려서는 철이 없어 그렇다지만, 살면서 부양이라는 책임의 무게를 깨달았다면 엄마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던 상황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전후 입 하나가 무섭던 각박한 시절, 늙은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신붓감은 협상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엄마는 자신의 처지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전처 자식들은 크면서 엄마에게 '계모'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계모는 피난민에 이어 엄마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는 말이 되었다. 하지만 오빠는 엄마를 모욕하는 형제들을 증오하기보다, 엄마를 혐오했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오빠의 혐오가 엄마 때문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으르렁대며 증오했던 건, 후처의 자식이라는 극복하지 못한 자신의 열등감이었다. 그는 엄마의 삶을 연민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자신이 불쌍했을 뿐이다.
 
그의 분노는 정당한가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의 한 장면. ⓒ tvN

 
옥동은 합법적 배우자도 되지 못하는 첩이라는 지위였으니, 동석이 가지는 열패감은 더 컸을 것이다.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는 법 없이, 본처 자식들에게 폭행당하는 걸 알면서도 위로도 하지 않는 엄마가 미웠을 것이다. 그런 옥동을 잘했달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시대의 모성이 그렇게 말랑말랑할 수 없었던 탓을 옥동에게만 돌리는 것은 온당치 않다.
 
동석은 옥동의 마지막을 보살피라는 푸릉의 선배들에게 으르렁댄다. 죽은 아버지의 친구가 하루아침에 양아버지가 되고, 어린 아들이 보는 앞에서 "부스럭부스럭 이불 소리 내며" 자는 광경을 본 적도 없으면서, 니들이 내 상처와 고통을 아느냐면서 포효한다. "여러 여자 만나도 결혼 생각 안 한 게" 그런 끔찍한 엄마 때문이라고 분노한다. 그의 분노는 정당한가?
 
입장을 바꿔 동석의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가 죽었다 치자. 아버지가 동석도 아는 동네 여자를 새 아내로 들여 버젓이 한 이불을 덮고 잔다면, 그때도 동석은 이처럼 혐오하고 분노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어려서는 반감을 갖겠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남자의 재혼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언제나 정당하다고 승인받는다. 아버지에겐 흠결이 되지 않는 재혼이 어째서 엄마에게는 이토록 가혹한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어린 동석은 엄마를 혐오할 수 있다. 그러나 마흔이 넘어서도 엄마의 가엾은 인생을 혐오만 하는 어른 동석에겐, 그 상처가 깊디깊다 해도, 동의하기 어렵다. 그가 엄마의 선택을 한 번이라도 마음을 열고 들여다봤다면, 엄마의 기막힌 인생-고아로 자라 남편을 바다에 묻고, 딸 역시 바다에 잃고 그 딸을 가슴에 묻은 인생-을, 그런 엄마를, 어찌 연민하지 않을 수 있나. 동석이 엄마를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하기까지 할 수는 없어도, 그 엄마의 인생을 연민할 수는 있지 않은가.
 
연민으로 돌아보면, 동석이 정말로 분개해 물어뜯어야 했던 건 엄마가 아니라, '애 딸린 과부'라고 함부로 취급하고 알뜰히 착취했던 가부장 사회가 아닌가. 강자에게 대들어 따지지 못하고(구조에 저항하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가장 약자였던 엄마를 혐오하는(취약한 개인을 공격하는 게 가장 쉬운 일이다) 동석의 자기 연민은, 왜 누구에게도 나무라지지 않는 것인가?
 
어린 귀싸대기를 때린 엄마를 용서하지 못하던 나는, 서른이 넘어 엄마에게 물은 적이 있다. 진지하게 물을 용기가 안 나 그냥 흘리는 말처럼 툭 던졌다. 그때 등을 지고 있어 엄마의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엄마는 찰나 얼음이 된 듯했다. 몇 초간 침묵하던 엄마는, "아 그때 머리에 무거운 걸 이고 한참 걸어오느라 하늘이 노란데, 니가 그렇게 확 달려드니까 나자빠질 것 같잖냐. 갑자기 열이 확 뻗쳤지 뭐."
 
언제 적 얘기냐, 언제 그랬냐, 되묻지 않고 바로 대답하는 걸로 봐서, 엄마 역시 그 귀싸대기 사건을 잊지 못했던 것이다. 무뚝뚝한 엄마는 "그때 많이 아팠냐, 서운했냐" 한 마디도 안 했다. 당연히 미안하다는 말도 없었다. 옛날 사람들은 미안하단 말, 잘 안 한다. 아니 못한다. 사과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가 내 물음에 그때 일을 비디오처럼 재생했다는 건, 못 잊을 만큼 미안했다는 뜻이다.
 
그때 엄마의 회상처럼 엄마 머리엔, 작은 몸으로 저 무거운 걸 어떻게 이고 왔을까 경악할 만큼, 엄마 몸의 몇 배나 되는 짐이 얹어져 있었다. 그 무게가 달려드는 아이를 "어매 내 새끼" 할 만큼의 무게가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무거운 짐을 하도 이었던 엄마는 결국 척추 협착으로 잘 걷지 못하게 돼 대수술을 해야 했다. 보름이 넘는 긴 기간 동안 병상을 지킨 건 어린 막내딸인 나였다. 오빠는 단 하루도 엄마의 병상을 지키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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