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튜브
대구시립무용단
독일어 'Bau'는 무용과 영화가 차용한 의미처럼 (여우나 너구리가 쓰는 것과 같은) 굴이란 의미가 있는가 하면 더 익숙하게는 건축(물)이라는 뜻도 지닌다. 'Der Bau'를 통해 카프카의 소설과 무용, 영화가 상호 굴처럼 연결되어 의미화의 연대를 축적하면서 동시에 각자의 의미를 각자의 방식으로 구축하고 표현해낸다. 소설, 무용, 영화를 비교 분석하는 것이 흥미로운 작업이 될 테지만 여기서는 무용에만 집중하기로 하자.
동작을 강화하는 혹은 제약하는 내레이션
카프카를 소환한 공연의 전반적인 의미화는 구성에서 내레이션으로 연결되는데, 이 때문에 '굴'의 의미화의 짙고 긴 그늘은 더더욱 피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소리 나는 장소에 가까이조차 가지 못하는데 희미한 소리는 변함없이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계속 울린다. 어떤 때는 사각사각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하다. (...) 저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 벽에 귀를 바짝 대지 않고 그냥 통로 가운데서 엿들어보면 (...) 이 소리의 근원을 제대로 알아맞혔더라면 그것은 바로 발견되어 (...) 그런 사각사각 소리를 넘겨듣기도 하는데 귓속에서 자신의 피가 지나치게 박동할 때면 그 두 가지 멈춤이 하나로 합쳐져 잠깐 동안 그 사각사각 소리가 영원히 끝났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럴 때면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는다. 펄쩍 뛰어오른다. 인생이 송두리째 변화된다. 굴의 정적이 흘러나오는 근원이 열리기라도 하는 것 같다. (...)
오랫동안 나는 한 가지 생각을 가지고 유희를 하고 있으니, 즉 그 동물이 맹렬하게 작업을 하는데 산책하는 사람이 노천 통로를 지나가듯 빠르게 땅을 파서 그가 팔 때면 땅이 진동하고 그가 지나간 한참 후에도 여전하여 (...) 나는 다만 나에 관하여 알고 있다고는 전혀 주장하고 싶지 않은 그 동물이 나를 포위하고 내가 그것을 관찰하고 있는 이래로 몇 개의 포위 원을 나의 굴 주변에 그어놓았을 것이라고 가정할 뿐이다."
공연 중 사용된 내레이션을 내 마음대로 일부 내용을 빼고 축약했다. 근현대의 가장 유명한 소설가의 작품을 춤으로 변용한다고 선언한 만큼, 또 적잖은 분량의 내레이션을 사용한 만큼 '아이 튜브'는 내레이션에 불가피하게 구속된다. 따라서 소설 및 소설 텍스트와 오브제를 포함한 몸의 표현 사이 연결의 유기성이 작품의 성패를 가르게 된다. 댄스비전2022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으니 아마 그 유기성의 수준이 높다는 판단을 받은 듯하다.
▲아이튜브
대구시립무용단
의미화와 관련하여 또 다른 논의점은 공연 제목이 '아이튜브(i tube)'라는 것. 영어단어 '튜브(tube)'는 독일어 'Der Bau'와 의미의 통로로 연결되나, 거기에 'i'가 추가되어 일종의 단차가 생긴다. 'i'는 아마 '나'를 뜻할 테니 공연의 제목은 '나의 굴'이 되고, 카프카 소설의 맥락을 깔고 관객에게 자신의 굴을 성찰하라고 하는 다소 진지한 공연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 더불어 모든 관객이 공연 중에 일종의 단독자로, 즉 밝은 무대만으로 바라보는 어둠 속의 'i'의 정체성을 갖는 만큼 'i'라는 첨언은 자칫 클리셰로 작동할 위험을 갖는다.
이 작품을 안무한 김성용 대구시립무용단 예술감독 겸 상임안무자 또한 관객의 '나'에 초점을 맞춘 듯하다. 이 단차의 예술적 의미화의 적정성 또한 평론하는 사람에겐 관심사이겠으나, 관객의 수용 과정에선 저 너머로 사라져버리고, 관객의 '나'로 튜브로 매개된 춤이 직접 돌입할 뿐이다. 진지하지만 클리셰를 피하는 데 성공했는지는 각각의 'i'인 관객이 답할 일이지만, 진지하면서 클리셰도 아니라면 관객이 불편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 아이튜브
대구시립무용단
북금곰의 유영
국립극장 공연에서 디테일에서 변경 또는 개선이 이루어졌다. 튜브를 애초에 무대의 공중에 띄워놓고 입장하는 관객을 맞는다. 오브제와 관객이 먼저 대면하도록 함으로써 의미화를 예열하고 이어지는 숨 가쁜 동작으로 의미를 상각한 무의미의 의미화로 관객을 이끈다. 의미화의 혁신은 춤의 진부화를 어느 정도 용인한다.
튜브는 하나에서 두 개로 분열되었다가 다시 하나로 합체한다. 통상 문예비평에 운위되는 세계의 분열과 대립, 그리고 태초의 통일로 복원이란 도식은 여기에 적용되지 않는다. 튜브가 상징하는 것이 세계가 아니라 개체의 고립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분열될 수 있지만 고립은 함몰할 뿐이다.
'아이튜브'는 세계인의 보편적 고독과 존재의 위기를 몸의 언어로, 그것도 근현대의 가장 유명한 작가의 텍스트를 기반으로 형상화한 만큼 한국 현대무용의 지평을 넓히는 데 역할할 수 있다. 반대로 그 보편성 추구가 몇몇 특수성 영역의 절뚝거림으로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보편성의 바다는 어디에서든 쉽게 뛰어들 수 있지만, 그 바다는 너무 넓고 깊어서 북극곰처럼 하염없이 헤엄칠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언제든 익사할 위험에 직면한다. 하긴 지구온난화로 북극곰마저 익사 위험에 직면한 세상이니 뛰어듦 자체로 칭찬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글 안치용, 사진 대구시립무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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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영화 등 예술을 평론하고, 다음 세상을 사유한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세계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나이 들어 신학을 공부했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ESG연구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영화평론가협회/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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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와 북금곰이 튜브놀이하며 춤을 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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