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 <붉은 단심>의 한 장면.
KBS2
이들은 대체로 중소 규모 토지를 보유한 지주계급이었다. 이들 모두가 지주였던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대체로 그랬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지주가 아니면 자기 문중이 지주인 사람들이었다. 부모가 지주가 아닐지라도 문중이 지주 가문이면 가문 어른들의 후원을 받아 과거시험을 준비하거나 성리학을 연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지주계급의 이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는 이전 시대 지배층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이색적인 특질이 있었다. 이들은 외형상, 유교 철학자인 성리학자들로 비쳐졌다. 지주계급보다는 철학자의 외관을 더 많이 드러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새로운 집단이었다.
이들이 철학자들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이 연구하는 성리학이 종전의 유교·유학과 달리 철학적 색깔을 농후하게 띠었기 때문이다. 맹자나 공자 같은 초기 유학자들이 정치학자나 윤리학자에 가까웠다면, 이들은 석가모니의 특성까지 겸비한 철학자에 가까웠다.
유교에 철학을 가미해 신유학을 발달시킨 송나라 유학자들의 상당수는 불교를 연구한 경험이 있었다. <주자문집>에 따르면 성리학의 대가인 주자는 15세부터 24세까지 불교 연구에 전념했었다. 당대의 저명한 유학자들인 주렴계·장횡거·왕안석·정명도·정이천·육상산 등도 불교 전문가들이었다.
맹자나 공자보다는 석가모니가 철학적으로 더 깊었기 때문에, 유학자들이 철학적 사유를 갖추려면 불교를 연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유교가 불교의 힘을 빌려 성리학을 발달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신유학 이전의 유학자들은 신독(愼獨)의 독(獨)을 '남은 모르고 나만 아는 상태'로 이해했다. <중용>의 "군자는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君子愼其獨也)"라는 문장을 근거로 하는 신독을 그렇게 해석했다.
그러나 주자의 제자인 성리학자 진식(陳埴)은 '남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상태'로 '독'을 이해했다. 일종의 무의식이나 잠재의식 상태로 봤던 것이다. 이처럼 진식 같은 성리학자들은 무의식 상태에서 수행하는 것을 신독으로 이해했다. 인도 대승불교 분파인 유식학파는 무의식 영역을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 명명했다. 이런 불교철학 개념이 신유학자들의 사유에 나타났던 것이다.
욕망은 감추고 철학적 방법으로 공격
오늘날 대한민국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대규모 부동산 소유자들은 욕망을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이들은 '종부세를 인하하라', '경제를 망치려는 건가', '우리를 압박하면 세입자들이 힘들어질 것이다(우리가 받는 압박을 세입자들에게 전가시킬 것이다)' 등등의 목소리를 내기까지 한다. 너무 저차원적인 목소리를 내기 때문에 다(多)부동산 소유자들은 사회적 존경을 받지 못한다.
그에 비해 사림파들은 지주계급으로서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욕망을 최대한 감췄다. 이들은 '도(道)에 대한 억압의 수준을 인하하라', '천리를 망치려는 건가'. '우리를 압박하면 도(道)가 힘들어질 것이다'라는 식으로 욕망을 순화시켜 정치적 목소리를 발산했다.
또 상대 진영을 공격할 때도 도(道)의 개념을 운운하며 철학적 방법으로 공격했다. 정치적 공격을 가할 때도 구체적인 정치적 쟁점을 언급하기보다는 상대방의 근원적 문제점을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세상에 철학적·근원적 문제가 없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으므로, 그런 식으로 공격하면 상대편은 문제 있는 사람들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의 정치투쟁을 벌이는 선비들이 중소 규모의 부동산까지 보유하고 있어 함부로 대하기도 힘들었으니, 이들을 상대했던 구세력이 얼마나 난감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