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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전설들의 우정, 메달보다 빛났다

베이징 올림픽, 고다이라와 이상화의 아름다운 우정이 증명한 것

22.02.14 13:50최종업데이트22.02.14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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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에서 한국 해설자가 일본 선수의 경기를 응원하고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는 장면이 나왔다. 그 주인공은 바로 한일을 대표하는 두 '빙속전설' 이상화와 고다이다. 오랜 세월 같은 길을 나란히 걸어온 동반자들끼리만 공유할 수 있는 우정과 진심이, 한일 시청자들의 마음까지 울렸다.

선수생활을 은퇴하고 해설위원으로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에 참여한 '빙속여제' 이상화가 절친이자 라이벌이었던 고다이라의 경기를 중계하다가 결국 눈물을 흘렸다. 고다이라는 13일 중국 베이징의 국립 스피드스케이팅오벌에서 열린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에서 38초09의 부진한 성적으로 17위에 그쳤다.
 
고다이라는 지난 2018 평창대회에서는 이상화의 올림픽 3연패를 저지하며 시상대 가장 위에 오른 바 있다. 지난 대회를 끝으로 은퇴한 이상화와 달리 3살이 더 많은 고다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남았고 이번 대회에서는 디펜딩챔피언 자격으로 2연패에 도전했다. 
 
하지만 고다이라 역시 흐르는 세월은 막을 수 없었다. 고다이라는 높은 주변의 기대와 대회 2연패에 부담감이 컸던듯 평소보다 극히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해설위원으로 나선 이상화가 유독 고다이라의 경기에 몰입하는 듯한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다. 이상화는 고다이라가 등장할 때부터 마치 자신이 경기를 하는 것처럼 음성부터 긴장한 기색을 드러냈다. 
 
고다이라는 러시아의 안겔리나 골리코바와 함께 레이스를 펼쳤다. 이상화는 경기 시작과 동시에 음성이 높아지며 "잘 뛰어 나갔어요" "같이 가줘야죠" "조금 느려요" "서두르지말고 따라가면 됩니다"라며 시종일관 고다이라의 시점에서 해설을 이어갔다. 하지만 격차가 점점 벌어지기 시작하자 이상화는 "아~"하고 안타까운 탄성을 내지르기도 했다. 

결국 고다이라가 예상보다 부진한 모습으로 사실상 메달권에서 멀어지자 "포기하지 말아요, 끝까지 가"라고 독려하다가 돌연 목이 메이는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고다이라는 결국 아쉬운 성적으로 레이스를 마치며 고개를 숙였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린 이상화는 "고다이라가 이 왕관의 무게(올림픽 챔피언 수성)를 이겨낼 줄 알았는데 참 심리적인 압박이 컸던 것 같다"며 안타까워 했다. 바로 4년전 고다이라에게 아쉽게 밀렸던 이상화였기에 누구보다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이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 후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시합전에 고다이라를 만나 '넌 이미 영원한 챔피언'이라는 이야기를 해줬다"고 격려했던 일화를 밝하기도 했다.
 
한일 양국팬들은 메달보다 빛났던 이상화와 고다이라의 따뜻한 우정과 동료애에 더 감동했다. KBS가 올림픽 코너로 제작한 '이상화의 절친노트'에서 이상화는 고다이라와의 오랜 인연에 대해 설명했다. 처음엔 그냥 알고만 지내온 사이였지만, 시니어 무대에서 다시 재회하게 되며 고다이라가 먼저 다가와 이야기를 걸면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이상화는 고다이라에 대해 "인간성과 배려심이 좋다. 승부욕이 강하면서도 남을 배려할 줄 안다. 진짜 착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선수로서의 고다이라는 사실 이상화보다 늦게 두각을 나타냈다. 이상화는 이미 2010년 밴쿠버 대회와 2014년 소치 대회에서 2연패를 달성하며 일찌감치 세계 최고의 선수임을 입증했다. 항상 이상화의 그늘에 가렸던 고다이라는 이상화를 목표로 하여 따라잡기 위하여 절치부심했고, 2018년 평창 대회에서 자신의 생애 첫 금메달이자 자국에 스피드스케이팅 최초의 금메달을 안기며 마침내 이상화를 넘어섰다. 홈팬들 앞에서 열리는 마지막 올림픽에서 이상화가 금메달을 따내고 명예롭게 선수생활을 마감하기를 기대했던 한국 팬들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당시 승자인 고다이라가 보여준 놀라운 '품격'은, 민감한 한일전이라는 긴장감을 넘어선 감동을 선사했다. 고다이라는 먼저 레이스를 마친 뒤 환호하는 팬들을 향해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며 정숙해줄 것을 부탁하는 제스츄어를 취했다. 바로 자신의 다음 차례인 이상화가 경기에 집중할 수 있게하기 위한 배려였다. 상대가 가장 유력한 라이벌인만큼 견제하는 심리가 생길 법도 했지만, 고다이라는 어긋난 승부욕보다 성숙한 페어플레이를 지키려고 했다.
 
또한 고다이라는 금메달이 확정된 이후 본인의 기쁨보다는 은메달을 차지한 이상화에게 다가갔다. 고다이라는 눈물을 흘리는 이상화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한국말로 "잘했어"라고 위로했다. 두 선수가 각자 자국의 국기를 들고 나란히 트랙을 도는 모습은 평창올림픽 최고의 명장면으로 남았다.

고다이라는 이상화가 선수생활을 은퇴한 데 이어 가수 강남과의 결혼하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을 때도 잊지 않고 항상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등 변함없는 우정을 지켜온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이번 대회에서 2연패에 실패했지만 부진한 성적으로 아쉬움이 클 법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금메달을 차지한 잭슨을 찾아가 축하해주는 등 여전히 성숙한 매너를 잊지 않았다. 이상화가 그녀를 왜 '선수로서나 인간으로서나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는지 보여준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냉랭했던 한일 양국에서도 고다이라와 이상화의 우정에 있어서는 감동적이라는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이상화가 고다이라의 경기를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상화가 우는 모습이 공개되자 SNS에선 국경을 넘은 두 사람의 우정을 나타내는 글들이 쏟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두 한일 스포츠 전설의 우정은 선의의 경쟁자에서 동반자로 진화해가는 성숙한 관계의 모범을 보여줬다. 스포츠든 정치든, 갈등과 경쟁이 만연한 세계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진심어린 존중과 이해가 있다면 누구나 영원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다이라와 이상화의 아름다운 우정이 증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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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 고다이라 스피드스케이팅 애런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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