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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영화가 다 있어" 감독의 대답은

[리뷰] 로이 앤더슨 감독의 <끝없음에 관하여>

21.12.23 17:29최종업데이트21.12.23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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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영화관에 가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하지만 영화에 거는 기대는 비슷하다. 재미있되 뭔가 여운을 남기는 영화 아닐까. 오락과 교훈이라는 오래된 미학적 규범에 충실한 영화를 기대한다. 그래서 모든 영화는 일정한 영화문법을 지향한다. 긴장과 이완, 빠름과 느림, 잔치와 파장, 대결과 화해처럼 대척적인 상황의 조합과 해소를 배치한다.
 
로이 앤더슨 감독의 <끝없음에 관하여>는 이런 고답적인 문법을 박살낸다. 뭐, 이런 영화가 다 있어, 하는 볼멘소리가 절로 나온다. 76분 동안 30가지의 장면이 등장한다. 각각의 장면은 독립적이며, 상호 연결고리도 아주 느슨하다. 두어 가지 사건과 인물이 서로 겹칠 뿐, 나머지 장면들은 따로 존재한다. 조각 그림을 맞추는 것 같다.
 
반면에 아무 연관도 없어 보이는 장면들도 나름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을 가진다. 설령 그것이 열린 결말이라 하더라도. 또한 인과율로 엮이지는 않지만, 장면들 사이에는 무엇인가 친연성이 있는 듯하다. 그것이 인간과 세상에 대해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다. 21세기 세상과 인간의 삶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믿음을 잃은 신부 이야기
 

영화 <끝없음에 관하여> ⓒ 찬란

 
육중한 십자가를 지고 비틀거리며 걷는 초로의 사내에게 채찍질이 날아온다. 가시 면류관을 쓴 채 가까스로 걸음을 옮기는 사내. 분노한 군중의 고함이 터져 나온다.
 
"쓰레기 같은 놈아! 일어나! 십자가에 묶어!"
 
로마 병사들의 잔인하고 끈질긴 채찍을 맞으며 골고타 언덕을 힘겹게 걸어 올라가는 예수의 현대판 변용이다. 꿈의 주인공은 신부다. 그는 날마다 같은 꿈을 꾼다. 신을 향한 믿음을 잃어버린 날부터 신부는 계속해서 똑같은 꿈에 시달린다. 견디다 못한 그가 정신과 전문의 린드 박사를 찾는다. 망연한 표정으로 의사가 되묻는다.
 
"신은 없는 게 아닐까요?!"
 
21세기 인공지능 로봇이 활보하는 기술과학의 전성기에 인류에게 신이 필요한지, 신에게 정말 인간은 의지하고 있는지, 당신의 믿음은 안전한지 묻는 듯하다. 20세기가 여명을 밝히려는 순간에 우리의 자랑스러운 철학자 니체는 '신이 죽었음'을 선언했다. 그런데 이런 시간대에 감독은 또다시 낡고 고답적인 질문을 던진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그래도 사랑만은?!
 
특수한 전쟁영화를 제외하면 사랑이 없는 영화는 없다. 사랑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끝없음에 관하여>에서도 사랑은 있다.
 
이슬람 신도로 보이는 중년 사내가 손에 피 묻은 칼을 든 채 구슬프게 울고 있다. 그의 무릎에는 배가 피로 범벅된 채 죽은 젊은 여성이 누워있다. 살인자가 피살자를 향해 끝 모를 애통함을 전달하는 기묘하고 기막힌 장면. 
 
"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명예 살인을 했어!"

 
이슬람 율법에 따라 배신자로 지목된 딸을 스스로 처단해야 했던 아비의 괴로움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감독이 묻는다. 언제까지 이런 살인이 종교와 관습과 가족의 이름으로 계속되어야 하는가?! 누구를 위한 명예이고 살인인가? 아직도 사랑은 종교와 계율에 종속된 부차적인 가치이자 덕목이며, 사랑은 상위 가치의 부속물에 불과한가?
 
여행 가방을 들고 정거장에 홀로 내린 여성이 낙심한 얼굴이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정거장 벤치에 홀로 앉는 그녀. 어디선가 사내가 발걸음을 서두르며 그녀에게 다가온다. 장난을 치다가 이윽고 포옹과 키스를 나누는 그들. 나란히 걸어가는 그들 어깨 위로 따사로운 햇살과 하늘의 표정이 화사하다. 구원의 빛처럼 홀연히 나타난 사랑!
 
누구를 위한 전쟁이며 학살인가
 
<끝없음에 관하여>에서 감독이 들여다보는 치명적인 현상은 전쟁이다. 신석기혁명 이후 인류가 고안해낸 국가가 등장한 이래 전쟁은 한시도 인류 곁을 떠난 적이 없다. 더욱이 인간이 맞닥뜨린 전쟁 가운데 가장 참혹한 대규모 전쟁은 2차 세계대전이다. 전쟁의 주역이자 도발자는 당연히 아돌프 히틀러고, 따라서 그는 영화에 필수적인 인물이다.
 
지하 벙커에서 히틀러의 부하들이 술에 취한 듯, 마약에 취한 듯 허우적거린다. 부관을 대동한 히틀러가 초점 없는 눈길로 합류한다. 포성이 들리는 벙커 여기저기서 흙더미가 무너져내리고 있어서 엄중한 상황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세상을 정복하려 했으나, 실패할 걸 알았던 남자!"
 
다른 장면이 전쟁의 참화를 단적으로 웅변한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평원에 몇몇 보초병들의 감시 아래 수많은 포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걸음을 재촉한다. 그들의 얼굴과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발걸음과 군복 상태로 보건대 지치고 병약한 상황이 역력하다. 전쟁 포로들의 최후 행선지(行先地)는 '시베리아 포로수용소'다.
 
몇몇 인간의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으로 인해 연면 부절(不絶)하게 이어지고 되풀이되는 무의미한 살육과 전쟁을 고발하는 명장면이다. 올해 78세인 노감독 로이 앤더슨은 명쾌하게 주장한다. 이제야말로 우리는 전쟁과 살육을 멈춰야 할 때다.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
 
불신, 사랑, 전쟁, 죽음 같은 문제는 인류와 언제나 동행이다. 영화 제목이 <끝없음에 관하여>인 까닭은 그래서다. 생로병사의 순환에 갇혀버린 인간의 역사를 돌이키면 반드시 마주하게 되어 있는 풀 수 없는 난제. 하지만 여기서 멈춘다면 너무 절망스럽다. 앤더슨 감독은 마지막 출구를 열어 놓았다.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 남은 '희망'처럼!
 
흐름을 멈춰버린 듯 보이는 강에 철교가 부러져 있고, 거대한 성당이 잿빛 하늘 아래 우뚝하다.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가 흉물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하늘을 두 남녀가 날고 있다. 서로에게 깊게 의지하고 몸을 어루만지며 선량한 얼굴을 한 그들. 연인처럼 보이는 그들에게 서둘거나 초조한 기색은 없다. 살아있는 그들 덕분에 구원이 생겨난다.
 
늦가을의 저녁나절 황량한 벌판에 삐뚤빼뚤 포도(鋪道)가 나 있다. 승용차 한 대가 길가에 멈춰 있다. 고장 난 것이다. 몇 차례 시동을 걸려던 사내가 차 밖으로 나온다. 누렇게 시든 풀과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 멀리서 철새들이 날아가며 우는 소리가 들린다. 낙심한 표정의 사내는 보닛을 열고 이것저것 손을 본다. 그가 화면 밖 우리를 본다.
 
이 장면에서 당신은 무엇을 읽는가, 감독이 묻는다. 절망을 읽는다면 절망이 그대와 함께할 것이다. 희망을 보고 있다면, 희망은 당신 곁에 자리할 것이다. 감독은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가 감촉하고 바라는 모양대로 진행돼왔기 때문이다. 구원은 언제나 인간의 가장 깊고 은밀한 곳에 성스럽게 감춰져 있었기에.
로이 앤더슨 끝없음에 관하여 믿음 사랑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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