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릭스 '지옥'
넷플릭스
<지옥>의 내용은 크게 1~3부와 4~6부,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전반부의 내용은 새진리회라는 신흥 종교가 어떻게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는지를 보여준다. 서울 한복판에서 대낮에 좀처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시연'이 이루어지자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하고, 수년 전부터 이 현상을 경고해온 정진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된다.
이때 정진수와 새진리회가 핵심적으로 언급하는 기제가 있다. 바로 죄와 죄책감이다. 그는 시연이 스스로를 엄격히 정죄하지 못하는 인간들을 신이 직접 벌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하며 사람들을 죄책감이라는 공포에 휩싸이게 한다. 이는 그가 고지를 받은 박정자와 시연을 중계하는 것을 두고 협상하는 자리에서 아이들의 아버지가 없다며 그녀가 불륜을 저질렀을 것으로 기정 사실화하는 이유다. 또 자신의 해석과 사람들의 죄책감에 힘을 싣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가 시연당한 것으로 가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정진수의 일련의 행동과 발언, 고지와 시연에 대한 그의 해석이 정신분석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프로이트가 자신의 저서인 <문명 속의 불만>에서 분석한 종교의 구조 및 작동 양식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그는 모든 인간에게 에로스(사랑과 성욕)와 타나토스(죽음과 파괴)의 욕동이 있으며, 종교는 이 욕동을 통제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에로스적 욕동은 가족을 이루고 사회와 문명을 이루는 기반이지만 지나치게 탐닉하면 문명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이고, 타나토스적 욕동 역시 자기 파괴적인 욕망이기에 문명을 위협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특히 프로이트에게 종교는 두 욕동의 발현과 실천을 죄로 규정하고 개인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며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기제다. 이러한 종교 이해는 제사장이 의미를 부여해 인간의 파멸을 막았다는 정진수의 대사 그리고 그가 성과 관련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암시되거나 가장 파괴적인 욕동인 살인을 저지른 이들을 자신의 설명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희생자로 선택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볼 때, 곧 정진수에게 신의 존재와 시연의 대상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이미 중요한 논점이 아니다. 종교는 단지 사람들에게 죄와 죄책감이라는 삶의 의미를 부여해서 사회를 유지하면 그것으로 역할을 다할 뿐이다.
이 대목은 사실 <지옥>의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프로이트가 인간을 억압한다고 비판한 종교의 모델이 기독교인데다가 작중 정진수의 모습에서는 예수의 알레고리로 느껴지는 대목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진수가 성인이 되길 기다렸다가 향한 티베트 고원에서 시연을 목격하고 깨달음은 얻은 후 새진리회를 만든 것은 예수가 광야로 나가 신의 가르침을 깨달은 후 신의 말씀을 전하는 공생활을 시작한 것과 다르지 않다.
정진수가 사이비로 취급받는 것, 그가 꾸준히 선행을 베풀어 온 것, 심지어 그가 일찍이 자신의 운명과 최후를 알고 있던 것 모두 예수의 공생활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티브다. 그러다 보니 종교는 그저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기제이고, 더 나아가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가 인간을 죄책감으로 억누를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드라마는 다분히 도발적인 인상을 남길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가 제시한 인간상 배영재
반면에 후반부에서 <지옥>은 사회의 유일한 질서로 거듭난 종교와 그로 인해 강림한 지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포커스를 맞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진리회가 만든 질서와 진리에 순응한다. 또한 종교가 지나치게 효과적으로 인간의 욕동을 통제한 나머지 심리적으로나 내면적으로 사람들이 깊은 상처를 입는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처럼 엄청난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린다. 고지를 받은 이는 곧장 범죄자로 몰리고, 자신의 가족까지 낙인찍히는 것을 두려워하며, 아이들이 부모의 죄를 대신 자백하며 용서를 빌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처럼 카메라는 인간을 자멸로부터 구한다는 종교가 역으로 만든 지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춘다.
하지만 드라마는 작중 묘사되는 모습이 프로이트가 제시한 인간상과 유사한 배영재를 등장시키면서 지옥을 비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보여준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이성을 활용할 때 신경증에 시달리게 하는 종교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당대의 확신이나 진리, 믿음을 있는 그대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대신 근본적인 의심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PD인 배영재는 새진리회 다큐멘터리 제작을 두고 새진리회 덕분에 범죄율이 줄어들었다는 사제의 주장을 화살촉 범죄를 포함하면 그럴 리가 없다면서 반박하기도 한다. 새진리회에 저항하는 조직 '소도'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애쓰고, 더 나아가 소도의 도움을 받아 시연이 인간의 죄와는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현상임을 간파하는 등 '의심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언론인의 책무에 충실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성적이고 의심으로 가득한 배영재라는 인물의 존재는 획일화된 정의와 진리로서 종교의 구조를 만드는 정진수와 대립항을 이루고, 전혀 다른 전후반부의 이야기를 연결해준다. 작중 죄와 죄책감 못지않게 중요한 키워드가 자율성인데, 배영재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율성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면서 정진수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극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이에 더해 드라마는 다른 인물들을 통해서도 배영재라는 캐릭터가 상징하는 바에 힘을 실어준다. 새진리회의 폭거에 온몸을 던져 싸운 민혜진에게 한 택시기사가 "제가 확실히 아는 건 여긴 인간들의 세상이라는 겁니다. 인간들의 세상은 인간들이 알아서 해야죠"라고 말하며 격려와 위로를 건네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원인도, 해결책도 인간의 손에 달린 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