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2TV 드라마 <연모>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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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경우에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쌍둥이 출산에 대해 국가가 '포상금'을 지급한 사례들이 곧잘 확인된다. 신라본기에는 문무왕 10년 6월(670년 6월 23일~7월 22일)에 딸 하나와 아들 셋을 한 번에 낳은 한지부 주민에게 벼 200석을 지급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 헌강왕 17년(825년)에 딸과 아들을 각각 둘씩 한꺼번에 낳은 사람에게 벼 100석을 지급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여기에 언급된 100석과 200석의 가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조선시대 기록과의 비교를 통해 한층 명확하게 드러난다. 음력으로 조선 태종 7년 1월 16일자(양력 1407년 2월 23일자) <태종실록>에 따르면, 종9품에게 지급된 연봉은 쌀 14석과 면포 4필, 임시직 직원에게 지급된 연봉은 쌀 9석과 면포 3필이었다.
신라 때의 곡식 1석과 조선시대의 곡식 1석을 동등하게 평가할 수는 없지만, 신라 때의 100석과 200석이 조선시대의 10석보다 훨씬 더 값어치가 있었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분명한 사실이다. 조선시대 종9품 공무원의 연봉보다 훨씬 많은 100석 혹은 200석이 쌍둥이 출산 포상금으로 지급됐으니, 지금의 대한민국 정부보다 신라 정부가 통이 훨씬 더 컸다고 말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가 직접 나서서 쌍둥이 출산을 축하한 것은 이 일이 국가적으로 이로웠기 때문이다. 농토에서 일하는 백성의 숫자가 나라의 곳간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으므로, 국가 입장에서는 다산을 권장하기 위해서라도 그만한 돈을 쓸 필요가 있었으리라.
이런 분위기가 후대에도 연결됐다는 점은 조선 세종시대의 어전회의 풍경에서도 확인된다. 세종 13년 7월 5일자(1431년 8월 12일자) <세종실록>에서는 세 쌍둥이를 낳은 사노비 여성에 대한 포상을 논의하는 신하들과 세종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날 회의에서는 약간의 논쟁이 벌어졌다. 지금의 경남 합천군 일부인 초계군에 거주하는 그 여성이 낳은 쌍둥이 중에서 두 명이 곧바로 숨을 거뒀기 때문이다. 세 쌍둥이를 낳으면 쌀 10석을 주는 제도를 이 사안에도 적용할 것인가가 논란이 됐다.
신하들은 '결과적으로 한 명을 낳은 셈이므로 포상금을 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세종은 세 아이를 한 번에 낳은 사실을 중시해 지급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 논쟁은 결국 예조 관청의 절충안대로 '포상금을 지급하되 절반만 지급한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이렇게 국가권력이 포상금을 주면서까지 환영을 표시했으므로, 고대 이래로 한국에서는 쌍둥이 출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서는 부정적 인식이 존재했지만, 그것이 한국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민간에서는 그처럼 쌍둥이가 환영을 받았을지라도 쌍둥이 왕족에 대한 인식은 달랐을 거라는 것이 드라마 <연모>의 설정이다. <연모> 속의 왕실 사람들은 여아와 남아로 구성된 쌍둥이의 출생을 불길한 일로 받아들인다.
왕실과 쌍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