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언더그라운드> 스틸 이미지
시네마달
지하철 내·외곽의 노동에서 또 다른 중요한 두 축이 등장한다. 안전한 운행을 위해 필수적으로 행해지는 업무이지만, 지하철 정직원은 아닌 이들이 종사하는 정비 관련 하청업체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들이 첫 번째다. 그리고 두 번째는 새로이 그 노동에 진입할 예비 노동자들인 실업계 고교 취업반 학생들이다. 예비노동자들의 부모는 자신들이 흔히 말하는 기름밥을 먹으며 키운 자녀들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일터를 잡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런 소박한 꿈은 이제 나날이 좁은 문이 되어 감도 잘 안다. 자녀들 또한 자신들에게 주어진 진로가 공부 잘 해서 시험에 붙어 선택할 수 있는 경로와는 거리가 멀다는 걸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흔히 실업계 고교를 그린 독립영화들에서 해당 배경은 청소년 성장물의 주요 무대로 활용될 뿐, 현장의 노동과는 분리되기 일쑤다. 청년 세대의 비정규직화나 취업난을 묘사하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언더 그라운드>에서는 그대로 작업장의 노동과 연결된다. 그들의 몇 년 뒤 모습이 될, 청년 비정규직들은 담담한 어조로 정규직원과 자신들 사이에 놓인 차이의 벽을 얘기한다. 그리고 자조한다. 정직원은 뭔가를 타고 일하거나 이동하는 사람들이고, 비정규직은 걸어서 다니며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승객들이 지하철을 매일 이용하면서도 정작 볼 기회는 없는 암흑 속 터널을 그들은 상시적인 폐소 공포증과 안전사고에 노출된 가운데 묵묵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걷는다.
그렇게 지하철을 탈 없이 굴러가게 하기 위한 노동의 풍경 묘사 속에서 조금씩 전모를 드러내던 공공성을 둘러싼 쟁점들은 중반부를 지나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쟁점화가 되기 시작한다. 전반부의 시적 묘사에 매력을 느낀 이들이라면 보다 직설적인 쟁점 소개로 치닫는 후반이 아쉬울 테지만, 감독의 설계는 전반과 후반부 역할을 분리해 후반부를 보다 설득력 있게 풀어내기 위한 장치로서 명확히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정비와 보수작업에 투입되는 비정규직 외주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결성과 일반직 요구를 준비하는 풍경과 실업계고 예비노동자들의 진로 선택과정이 교차하면서 영화는 보다 더 첨예한 쟁점들로 나아간다.
인간의 노동이 지워져가는 지하철의 현 주소
영화가 중반에 들어서면, 초반에 펼쳐졌던 지하철의 장대한 풍경 묘사는 짧은 인터뷰들의 연속과 (감독이 숨은그림찾기 하듯) 하나씩 보따리를 풀기 시작한 실마리 장치들에 의해 하나의 지형도로 조합되기 시작한다. 개별적인 풍경들을 비추던 CCTV는 특정 지점에서 의도적으로 각 노동이 분야별로 담긴 짧은 화면을 연재하듯 조명한다. 그 직후부터 영화는 본격적인 공공성 의제 제기로 향한다.
기관사는 운행을 마친 객차 칸을 혼자 쭉 오가며 살핀 뒤 어두운 선로를 통해 퇴근한다. 예전에는 별도의 승무원이 있었지만 이제는 없기 때문이다. 부산지하철 옆 김해 경전철은 아예 무인운전으로 가동된다. 대구지하철 3호선 모노레일도 안전사고 문제를 제기한 끝에 무인 전철이지만 승무원이 배치되었다.(대구지하철의 과거 참사 영향일 테다) 기관사가 늦은 밤 퇴근하면 그 선로에서 일일이 사람이 밀어 이동하는 (속칭 "아시바"라 부르는) 철제 구조물에 매달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라인더로 먼지를 일일이 깎아내고 레일을 점검하는 노동을 개시한다.
중년 여성노동자들은 역사 바닥 전체를 샅샅이 물청소한다. 한편 차량기지에선 전동차를 크레인으로 통째 들어 올려 분해 정비한다. 그 거의 모든 과정은 이제 비정규직에게 맡겨져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샤워 시설 사용이건, 착용한 작업복 컬러건, 식권의 색깔이건 모두 다르다. 그럼 대체 정규직은 뭘 하는 사람들일까? 왜 저렇게 지하철 운행에 필수적인 일을 하는 이들은 비정규직에 머무는 걸까? 의구심이 절로 생겨나지 않을 수 없는 장면들이 거듭 이어진다.
그리고 이제껏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정규직원 노동자가 선을 보인다. 그리고 과거에 정규직 직원이었던, 몇 해 전 분리된 무인화 과정의 결과로 일터가 사라진 매표원 노동자들도 등장해 증언하기 시작한다. 매표원 노동자는 지하철에서 필수업무가 하나둘 외주화가 되어온 과정에 대한 증언자로, 직무배치 전환대상이 된 나이든 정직원은 적성검사와 전환교육에 불안한 미래를 근심하는 모습이다. 그들은 이 거대한 작업장의 미래상을 관객이 함께 근심토록 유도한다.
영화 속에서 정직원은 비정규직의 일반직 전환에 대해 (인천공항공사나 다른 공기업들처럼)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정규직 노동조합은 비정규직을 지원하는 모습을 명확히 취하고 있다. 그저 도매금으로 노동조합이 정규직 기득권이라 비난하는 이들에겐 쐐기를 박는 실재하는 FACT CHECK 장면이다. 현실의 문제는 그렇게 무 자르듯 쉽지 않고, 노동자의 문제는 노동자 스스로 풀어야 한다는 감독의 입장은 명확하다.
노동영화에 대해 신, 구를 구분하는 괴이쩍은 분류기준이 있다. 조직된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다루는 <파업전야> 부류의 작품과, 모든 게 파편화된 자본주의가 승리한 세상에서 개인의 무력함과 소외를 전시하는 부류의 작품이 21세기 기준으로 나뉘는 식이다. 하지만 김정근 감독의 <언더그라운드>는 흔히 21세기 노동영화와 기존의 노동영화를 구분하는 출처불명의 분류기준을 가뿐히 넘어선다.
부산 지하철이라는 거대한 작업장을 총체적으로 묘사해내고, 사회적 주제의식을 뼈대로 삼아 노동의 장엄함과 소외, 노동자의 탄생과 소멸을 종횡으로 연결해내는 작업이다. 작가적 야심과 치열한 사회의식, 연대와 신뢰에 기반을 둔 밀착 접근한 태도 등 여러 면에서 본 작품은 근래 보기 드문 노동영화의 성취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