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경기도 안양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4차전 안양 KGC 인삼공사와 전주 KCC 이지스의 경기. KGC 설린저가 슛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0-21시즌 프로농구 플레이오프는 '설린저 쇼크'로 요약된다. 외국인 선수 제러드 설린저를 앞세운 안양 KGC인삼공사가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하며 플레이오프 전승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정규시즌 3위를 기록했던 인삼공사는 KT와 6강 플레이오프(5전 3선승제)를 시작으로 현대모비스와 4강 플레이오프(5전 3선승제), KCC와 챔피언결정전(7전 4선승제)까지 10연승을 내달렸다. 역대 플레이오프 최다 연승 신기록이다.
프로농구 역사상 전승 우승은 2005-06시즌 서울 삼성-2012-13시즌 울산 현대모비스(이상 7전전승)가 이었다. 이 팀들은 4강에 직행했기 때문에 경기 수가 적었다. 6강부터 플레이오프를 시작하여 전승 우승을 거둔 것은 인삼공사가 역대 최초다.
또한 인삼공사는 2011~2021, 2016~2017시즌에 이은 통산 세 번째 챔피언에 등극했다. 또 울산 현대모비스(7회), 전주 KCC(5회), 원주DB(3회)에 이어 3회 이상 우승을 차지한 역대 4번째 팀이 됐다. 정규리그 3위팀이 챔프전 우승을 차지한 것은 2003년 원주 DB, 2009-2011년 KCC, 2016년 고양 오리온에 이어 역대 5번째다. 앞선 두 번의 우승 확정을 모두 원정에서 경험했던 인삼공사가 홈에서 우승 축포를 쏘아올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승기 인삼공사 플레이오프 통산 감독 승률에 70.6%(24승 10패) 기록하며 역대 1위에 올랐다. 플레이오프 승률이 7할대를 기록한 감독은 김 감독이 유일하다. 프로무대에서 선수-코치-감독으로 모두 우승을 경험한데다, 인삼공사에서만 2016-17시즌에 이어 두 번째 우승을 이끌며 허재-문경은-이상범 감독에 이어 프로 선수 출신으로 가장 성공한 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더구나 올시즌 우승은 김승기 감독이 프로농구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는 유재학 감독-자신의 평생 멘토로 꼽아왔던 전창진 감독과의 챔프전 대결에서 모두 완승을 거두며 이룬 성과이기에 더욱 돋보인다.
인삼공사는 올시즌 개막 전부터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기는 했지만 막상 정규리그에서는 기복심한 모습을 보이며 최상의 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6강에서 만난 KT와는 3승 3패로 호각지세였고, KCC와 현대모비스는 정규시즌 순위에서 앞서 4강에 직행하며 인삼공사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들어 인삼공사가 전혀 다른 팀으로 거듭나며 정규시즌에서의 데이터는 무용지물이 됐다.
인삼공사의 변신은 제러드 설린저의 입단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인삼공사가 정규시즌 중반까지 다소 고전했던 이유는 외국인 선수들이었다. 에이스 역할을 기대했던 얼 클락과 크리스 맥컬러가 아쉬운 기량을 보이며 연이어 교체되었고 시즌 막바지인 5라운드 후반에 마지막 승부수로 영입된 선수가 바로 설린저였다.
미국프로농구(NBA) 1라운드 출신으로 통산 269경기를 뛴 설린저는 국내에서 활약한 외국인 선수를 통틀어도 가장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선수 중 한 명이다. 하지만 부상과 자기관리 실패로 NBA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가지는 못했고 이후 스페인리그와 중국리그를 거쳐 3대3농구에까지 출전했던 파란만장한 경력을 갖고 있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약 2년 동안 현역 공백기까지 있어서 많은 이들은 설린저의 기량에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설린저의 클래스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설린저는 정규리그 10경기에서 26.3점, 11.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KBL 무대에 적응기를 거쳤고 4위였던 소속팀의 순위를 3위로 올려놨다. 플레이오프에 들어서는 6강에서 평균 28점 10.3리바운드 4.0어시스트, 4강에서는 무려 33.8득점 14리바운드 3어시스트로 점점 기록을 끌어올리며 진가를 발휘했다.
KCC와의 챔프전에서는 4경기 23.3점 13.8리바운드 5.8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챔프전에서는 고득점보다는 동료들을 살려주는 이타적인 플레이에 조금 더 치중했다. 마지막 4차전에서는 42점을 올리며 필요할 때 몰아치는 클래스를 과시했다. 너무나 차원이 다른 압도적인 활약에 챔프전 MVP도 이견의 여지 없이 설린저의 몫이었다.
KCC 전창진 감독은 챔프전을 앞두고 "설린저가 혼자 아무리 고득점을 올려도 팀인삼공사의 팀득점에는 한계가 있다. 70점대 이하로 묶으면 이길 수 있다"고 분석하며 자신감을 내비친 바 있다. 하지만 챔프전 인삼공사는 챔프전에서 무려 평균 92점을 내줬으며 2차전을 제외하면 모두 두 자릿수 이상의 점수차로 무너졌을만큼 보기좋게 완패했다. 영리한 설린저가 득점만 하는 선수가 아니라는 것, 인삼공사가 설린저에게만 의존하는 팀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 장면이었다.
한편으로 설린저의 활약상과 인삼공사의 연승행진은 경이롭기는 했지만, KBL에 있어서는 마냥 반가운 장면만은 아니다. 설린저가 대단한 선수임에는 분명하나 한국무대는 처음이었고 2년의 공백기까지 거친 선수였다. 그런데도 시즌 막바지에 설린저가 합류한 이후 플레이오프까지 약 3개월도 되지 않은 기간에 외국인 선수 단 한 명의 '히어로볼'에 의하여 리그의 판도 자체가 완전히 뒤바뀌는 현상이 벌어졌다.
올시즌 프로농구는 정규리그까지만 해도 국내 선수들의 활약이 어느 때보다 돋보였다. 최초의 고졸출신 MVP로 등극한 송교창(KCC)을 비롯하여 허훈-양홍석(이상 KT), 이대성(오리온) 등 국내 스타들이 주도하는 화려한 퍼포먼스와 라이벌 구도 등은 오랜만에 프로농구에 대한 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KCC는 정규시즌 개막 전까지 우승후보로 거론되지 못했으나 국내 선수들을 중심으로 한 끈끈한 조직력의 농구를 바탕으로 예상을 깨고 1위까지 차지하며 많은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정규시즌 후반기부터 각 구단들이 경쟁적으로 대형 외국인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인삼공사의 국내 선수들도 화려한 전력을 보유하기는 했지만 만일 설린저가 가세하지 않았더라면 인삼공사가 이 정도의 일방적인 연승행진을 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인삼공사와 마찬가지로 시즌 후반기에 외국인 선수 전원교체를 단행한 인천 전자랜드도 조나단 모트리를 앞세워 4강까지 진출했고 1위 KCC를 5차전까지 몰아붙였을만큼 기세를 높였다.
상대적으로 외국인 선수들의 기량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던 KT나 오리온은 예상보다 저조한 성적을 보이며 조기탈락했으며, KCC도 라건아가 건재하지만 부상으로 하차한 타일러 데이비스의 빈 자리가 너무 커 보인다.
외인들의 활약상이 부각되면서 상대적으로 국내 선수들은 플레이오프에서 조연에 머물렀다. 시즌 막바지에 합류한 특급 외국인 선수 1~2명의 원맨쇼에 따라 정규시즌 장기레이스에서 보여준 성과와 조직력 등이 순식간에 빛을 바래는 모습은 뭔가 허무한 느낌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코로나19 이후 전세계의 스포츠 시장이 위축되면서 외국인 선수들도 선택지가 줄어들며 다양한 리그로 이동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비교적 코로나19의 위험이 적고 외국인 선수들에게 좋은 대우가 보장되는 KBL로 눈을 돌리는 특급 선수들이 많아졌다.
설린저같은 선수들은 예년같으면 화려한 경력과 비싼 몸값 때문에 KBL에 데려오기 어려웠다. 교체선수로 뒤늦게 합류한 설린저는 올시즌 인삼공사에서 월 5만3천달러(한화 약 6300만 원)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약 3개월이 조금 넘는 기간동안 20만달러 정도를 지불한 것인데 설린저의 기량과 활약상을 감안하면 헐값 수준이나 마찬가지다.
그나마 설린저가 풀시즌이 아닌 짧은 기간만을 활약했기에 이 정도의 비용만 지불하고도 요긴하게 써먹는 것이 가능했다. 현재 KBL의 외국인 연봉 합계는 70만 달러이고 내년 시즌부터 90만달러로 인상한다고 해도 세금 문제 등을 감안하면 풀시즌을 기준으로 설린저의 폭등한 몸값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설린저가 NBA 복귀를 모색할 수도 있고, 중국이나 타 리그에 진출한다고 해도 KBL보다 더 많은 돈을 만질 수 있다. 인삼공사가 다음 시즌에도 설린저의 팀 잔류 여부를 선뜻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다.
어떤 면에서 설린저의 돌풍은 결국 오랜 시간에 걸쳐 팀을 잘 만들고 선수를 육성하는 것보다, 똘똘한 외국인 선수 한명 잘 데려오는 것이 성과를 내기에 훨씬 유리한 한국농구의 현 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다음 시즌에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정도의 성적을 기록한 팀들이라면 시즌 막바지 외국인 선수교체로 승부수를 던지는 패턴이 반복될 가능성도 높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한 설린저와 인삼공사의 우승이 뭔가 주객이 전도된 듯한 묘한 여운을 남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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