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Y 드라마 <가시리잇고>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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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조선왕조를 위해 열심히 활동했고 또 상당한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 조선시대에는 그가 지금처럼 높은 평가를 받기 힘든 이유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그에 대한 평가가 세종대왕에 대한 평가와 연동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박연은 자기 음악을 한 게 아니라 세종의 음악 사업을 보조했다. 그래서 그에 대한 평가는 세종에 대한 평가와 일정부분 연동될 수밖에 없었다. 세종이 어떤 평가를 받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는 구도가 존재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세종을 지금처럼 숭상하지 않았다. 세종이 대한민국 시대의 존경을 받는 것은 이 시대 사람들이 한글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한자를 사용하던 시대의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까지 존경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세종에 대한 존경심은 존재했다. 그가 동북방 여진족을 제압해서 국경을 안정시키고 과학·음악 등의 문물제도를 발달시킨 사실은 조선시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를 높이 칭송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음력으로 효종 4년 7월 2일자(양력 1653년 8월 24일자) '효종실록'에 따르면, 정승급인 이경여가 '세종시대에는 궁녀가 100명을 넘지 않을 정도로 왕실이 검소했다'며 세종을 칭송하는 장면이 나온다. 왕실 비용을 줄임으로써 조세부담을 덜어줬다는 뜻에서 그렇게 평가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시대의 평가는 지금의 평가에는 절대로 미치지 못했다.
세종이 지금 같은 존경을 받지 못했다는 점은 그의 아들이 세조로 불리는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다. 숙종의 아들이 영조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아버지는 종(宗)인데 아들은 그보다 높은 조(祖)로 불리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세종과 세조 부자처럼, 앞글자가 똑같은 상황에서 아버지는 '종'이고 아들은 '조'인 경우는 드물었다. 조선시대 관념으로 보면, 이것은 아들을 불효자로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높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이 출현한 데에도 세종에 대한 평가가 상당 부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예종 즉위년 9월 24일자(1468년 10월 9일자) <예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의 아들인 수양대군이 왕으로 있다가 죽은 직후에 신하들이 합의한 수양대군의 묘호(사당 내에서의 칭호)는 신종·성종 같은 칭호였다. 세조라는 묘호를 주장한 쪽은 수양대군의 아들인 예종이다. 신하들은 '세종이 이미 있기 때문에 세조라는 묘호를 쓰기 힘들다'고 주장했지만, 예종이 밀어붙이는 바람에 수양대군의 묘호가 세조로 결정될 수 있었다.
만약 세종이 지금 같은 존경을 받았다면, 예종이 세조 묘호를 고집하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신하들이 쉽게 물러설 필요도 없었을지 모른다. 세종이 지금만한 평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수양대군을 세조로 높이는 일이 별탈 없이 진행됐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세종에 대한 평가가 지금보다 낮았기 때문에, 세종을 도와 문화 사업을 벌인 박연 같은 신하들 역시 지금보다 높은 평가를 받기가 쉽지 않았다.
그랬던 박연의 인지도가 대한민국 시대 들어 높아졌다. 결정적 계기는, 1894년 동학전쟁(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조선왕조가 대중의 신망을 잃고 양반의 권위가 함께 추락한 현상에서 찾을 수 있다.
언어나 문자의 힘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힘에 의존한다. 한자가 강했던 것은 한자를 쓰는 사람들의 힘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동학혁명을 계기로 양반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이에 따라 양반이 쓰던 한자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 상황은 동학혁명 이후에 청년 주시경(1876~1914)이 한글 대중화에 나서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주시경은 양반의 권위가 추락한 틈을 놓치지 않고, 그간 사용빈도가 낮았던 한글을 대중의 문자로 활성화시키는 작업에 뛰어들었다. 그의 노력은 한글을 특권층의 문자가 아닌 대중의 문자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주시경의 업적은 한글을 개발한 세종이 뒤늦게 재평가되고 세종을 도운 박연 같은 신하들이 훨씬 높은 평가를 받도록 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이로 인해 박연은 세종과 더불어, 한자 시대가 아닌 한글 시대에 더 큰 주목을 받게 됐다. 자기 시대보다는 나중 시대와 '궁합'이 더 맞게 된 것이다.
박연 입장에서는 자신의 음악적 업적이 오래 기억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한글 시대 사람들이 잘되기를 비는 수밖에 없다. 혹시라도 영어나 중국어 사용자들이 한국 문화를 주도하게 되면, 그의 업적은 아무래도 잊혀져갈 수밖에 없다. 비록 드라마 설정 속에서나마 한글 사용자들의 시대로 환생한 것은 그의 입장에서는 반갑고 즐거운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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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