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왕의 공주와 온달 장군. 서울 아차산 부근인 긴고랑종점 부근의 버스 정류장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온달은 공주와 결혼한 뒤 무예연습을 하다가 577년 고구려 사냥대회에서 1등을 했다. 이로써 고구려 정치무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그는 중국 북주(北周, 후주)의 침공을 물리치고 평강왕의 사위로 공식 인정을 받았다. 그런 뒤 태왕의 부마로 안정적인 입지를 유지했다.
선봉장 온달을 앞세운 고구려 군대가 북주 군대를 물리침에 따라 중국대륙의 통일 열기는 주춤하게 됐다. 고구려를 향한 동진(東進) 열기도 함께 가라앉았다. 이로 인해 그 후 10여 년간 고구려는 평화와 안정을 누렸다. 이 10여 년간이 온달의 정치적 전성기였다.
모험을 택한 온달
그런데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 이것이 고구려 서부전선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그러더니 이듬해에는 온달의 장인이자 후원자인 평강태왕이 수나라의 외교적 압박을 받던 중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태왕의 장남인 영양태왕이 왕위에 올랐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평강태왕이 세상을 떠난 일은 온달의 전성기를 뒷받침하던 양대 축이 무너졌음을 의미했다. 바로 이 상황에서 온달은 모험을 선택했다. 577년 사냥대회에 출전할 때의 심정으로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또 한번 던지기로 한 것이다.
온달 열전에 따르면, 그는 새로 즉위한 영양태왕에게 전쟁에 자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고구려를 위해 직접 나가 싸우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싸우겠다고 한 대상은 수나라가 아니라 신라였다. 신라의 국력이 날로 강해지던 때라서 신라와의 전쟁을 자원한 측면이 크지만, 부담스러운 수나라보다는 만만한 신라와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워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 그와 영양태왕의 대화는 이랬다.
"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은 '신라가 우리의 한강 이북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으니, 백성들이 원통하게 생각하며 부모의 나라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하옵나니 대왕께서 이 불초한 사람을 어리석다 하지 않고 병력을 내주신다면, 가서 우리 땅을 반드시 찾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은 허락했다."
중국이 통일된 이듬해이자 영양태왕이 즉위한 직후였다. 이런 어수선함 속에서 온달은 참전을 자원했다. 누가 등을 떠다민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본인이 위험을 자처했다. 모험을 선택한 것이다.
'이 불초한 사람을 어리석다 하지 않고(不以愚不肖)'의 원문은 '이 불초한 사람을 바보 같다 하지 않고'로 번역해도 무방하다. 온달은 '저를 바보 같다 하지 마시고 군대를 내주십시오'라고 말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선택은 바보같은 측면이 없지 않았다.
<달이 뜨는 강>의 온달 아버지는 "부디 필부가 되어, 바보가 되어 조용히 평온하게 살아남거라"라고 말했지만, 실제의 온달한테는 그런 말을 해줄 어른이 없었다. "왕은 허락했다"고 역사는 말한다.
출정하기 전에 온달은 스스로 배수의 진까지 쳤다. 지금의 충북과 경북을 잇는 조령과 죽령까지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노라고 다짐까지 해두었다. '성공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로 자기 인생을 몰아갔던 것이다. 현실성이 낮은 정치적 계산을 바탕으로 가지 않아도 될 전쟁에 스스로 나섰다가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을 볼 때 온달에 대한 '바보'라는 평가가 아예 틀렸다고 보기 어렵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3
홈:kimjongsung.com**오늘의주요뉴스:sisahistory.com**김종성역사아카이브:https://db.kimjongsung.com**제15회 임종국상**저서:제도밖의권력, 영부인 리스크.아무도몰랐던독립운동이야기,친일파의굴욕,친일파의재산,반일종족주의무엇이문제인가,조선상고사,역사추리조선사,한국중국일본그들의교과서가 가르치지않는역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