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테넷> 포스터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한편 첩보와 SF 영화라는 장르 간의 만남은 <테넷>의 운명과 주체적인 삶에 대한 메시지를 새로우면서도 가장 놀란 감독다운 방식으로 전달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놀란 감독의 첫 첩보물인 <테넷>은 냉전과 제3차 세계대전이라는 용어를 직접 언급할 정도로 에스피오나지 장르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에스피오나지 장르는 두 진영 사이에서 피할 수 없는 첩보원의 고뇌를 중점적으로 다루며, 근래 <본> 시리즈나 <007: 스카이 폴> 같은 첩보 영화들도 타인을 믿기 어려운 상황에 던져진 주인공의 고뇌와 외로움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스스로의 삶을 주도하고자 하는 주인공의 서사는 이러한 장르적 특징과 조화를 이루면서 영화에 완성도를 더하고 있는 셈이다. 영국인과 미국인을 비교하는 유머가 곳곳에 포진한 것 역시 <테넷>이 영국의 상징이자 놀란 감독이 많은 애정을 드러냈던 007 시리즈의 영향 아래에 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첫 첩보 영화라는 새로움은 놀란 특유의 SF 영화스러운 상상력을 만나면서 놀란 감독만의 스타일로 귀결되기도 한다. <테넷>은 엔트로피를 통해 시간을 역행할 수 있다는 설정을 통해 운명을 가능한 한 과학적인 상상력의 범위 안에서 풀어낸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우주의 섭리, 혹은 신의 명령으로 여겨질 정도로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인 운명을 과학적으로 풀어내려는 그 시도만으로도 놀란 감독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현실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초현실적, 초자연적인 현상을 과학과 테크놀로지에 기반한 상상력으로 돌파하는 SF 영화의 특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이미 꿈과 시간, 유령 등의 의미를 풀어내기 위해 <인셉션>과 <인터스텔라>에서 과학적인 상상력을 뽐낸 바 있다.
더 나아가 놀란 감독 특유의 단점들이 <테넷>에서 보여준 일부 진일보한 성과들은 메시지와 주제를 더욱 깊게 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예를 들어 놀란 감독 작품에서 여성은 주로 남성 주인공의 목표, 트라우마 혹은 이상으로 존재했다. 그렇기에 전체적으로 클리셰를 따르면서도 전작들의 여성보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묘사된 캣은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있어 최소한 반발짝이나마 변화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고, 이는 영화의 메시지가 입체적으로 제시되는 데 힘을 보탠다. 또한 평면적이고 도구화되었다고 비판받는 주인공도 최소한 주제의식을 강화하는 데는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영화는 주인공의 이름을 마지막까지 밝히지 않는데, 이는 운명을 마주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결국 모두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전작들에서 다소 무기력했던 액션 연출의 경우에는 한 단계 진보한 것처럼 보인다. 작중 액션은 이탈리아에서의 카 레이싱과 오슬로 프리포트에서 펼쳐지는 액션처럼 과거와 미래, 현재 사건 간의 아귀가 맞아 들어갈 때 전율을 일으켜야 하는 순간인 경우가 많다. 이때 빠르고 리드미컬한 컷들로 이루어진 <테넷>의 액션은 현실감과 타격감이 극대화된 결과 몰입감을 잔뜩 끌어올리고, 그 순간의 충격을 최대로 만든다.
과거와 미래를 현재에 공존시키는 상상력으로 무장한 <테넷>은 분명 난해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어려운 영화다. 놀란 감독의 단점들도 여전히 반복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관객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수작이기도 하다. 두뇌를 자극하는 놀란 감독 특유의 스타일과 공식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운명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느끼게 되는 충격과 전율에서 헤어 나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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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및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영화와 드라마를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