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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보통의 소녀, 그 눈에 담긴 1994년 서울

[리뷰]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찬란한 기억, 영화 <벌새>

19.08.15 18:54최종업데이트19.08.15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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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포스터 ⓒ (주)엣나인필름


영화는 미시사의 역사를 담아낸다는 특징이 있다. 한 개인의 일상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과 의식을 조명한다. 이런 구성은 개인을 통해 같은 시대를 살아온 우리가 느꼈던 감정을 깊은 공감과 이해로 그려낸다. 김보라 감독은 자신의 첫 데뷔작으로 1994년 당시 자신과 같은 나이인 소녀의 일상을 그려냈다. <벌새>는 1994년 서울을 배경으로 맑지도 흐르지도 않던 은희의 일상을 통해 미시사로서의 역사를 말한다.
 
1994년은 군부 독재 정권의 잔재가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지 1년이 지난 시점이다. 국민들이 그토록 원하던 군부독재정권의 종식을 알리는 순간이었으며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를 꿈꾸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고도의 경제성장 때문에 국민들에게 근면성을 강요하고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사고가 만연했으며 인간보다 물질의 가치가 우선이 되는, 시대의 변화를 향한 열망과 일상에서 겪는 변화의 체감이 온도차를 보이는 시대이기도 했다.
 
14살 은희는 공부 대신 그림에 관심이 있다. 여느 중학생처럼 남자친구와 어울리는 게 좋고 공부하라는 담임선생의 말에 신물이 나며 가족보다 친구와 어울리는 게 더 즐겁다. 평범한 중학생 은희에게는 세 가지 고민이 있다. 첫 번째는 가족이다. 춤바람이 난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가 못마땅한 어머니, 학원 대신 남자친구와 놀러 다니는 언니와 그런 언니를 잡으려 드는 아버지, 똑똑하지만 성격이 나쁜 오빠와 그런 오빠에게 폭행을 당하는 은희의 관계는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서로를 사랑한다 말하지만 상처를 주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벌새> 스틸컷 ⓒ (주)엣나인필름

 
두 번째는 사랑과 우정이다. 둘도 없는 친구 지숙과의 다툼과 남자친구 숫기 없는 남자친구 지완과의 끈끈하지 못한 관계, 갑자기 나타나 애정을 표하는 후배 유리의 존재는 은희가 감당하기 힘든 감정적인 격화를 이끌어 낸다. 이런 영희에게 한문 학원 선생 영지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은희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섬세하고 굳게 어루만져주는 영지의 위로는 존경과 사랑 사이의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세 번째는 자신이다. 은희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아이가 아니다. 또 가족 내의 문제에서 스스로 균형을 잡는 성숙한 성격도 아니다. 오빠처럼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할 수도 없고, 언니처럼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속일 수도 없는 은희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는 불편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런 은희의 현재를 보여주는 소재가 혹이다. 은희는 귀 뒤에 난 혹으로 입원을 필요로 하는 수술까지 받게 된다.
 
이 혹은 은희가 지닌 내면의 고통을 의미하며 그 고통이 뭉치고 뭉쳐 혹이라는 형태로 형상화된다. 혹을 떼어내도 은희의 현재가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1994년이 되어도 사회는 여전히 물질의 가치가 우선되고 가부장적인 강압과 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지녔음을 보여준다. 이런 은희를 통한 보편적인 일상이 담아내는 당시의 의식과 시대상은 세 가지 소재를 통해 더욱 강화된다.
  

<벌새> 스틸컷 ⓒ (주)엣나인필름

 
첫 번째는 여성이다. 은희의 가족에서 여성들은 모두 남성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똑똑했던 어머니는 집안 사정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였고 떡 장사를 하는 아버지에 경제적으로 묶인 존재가 된다. 어머니는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건 물론 아버지가 외도를 하는 걸 눈감아 주는, 당시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을 보여준다. 이는 은희와 언니 수희 역시 마찬가지다. 수희는 질이 나쁜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학원을 빠지고 놀러 다니면서 아버지에게 혼이 난다.
 
수희의 모습은 개인의 일탈처럼 비춰질 수 있지만 오빠 대훈이 아버지에 의해 명문대에 진학해야 된다는 기대감에 스트레스를 안고 있다는 점,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공부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그 스트레스로 엇나간 존재로 볼 수 있다. 은희는 대훈이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폭력의 대상이 된다. 대훈의 폭행은 부모에 의해 남매간의 싸움으로 치부되고 눈앞에서 본 폭력 역시 침묵 속에 넘어가게 된다.
 
어머니는 은희에게 꼭 대학에 진학하라고 말한다. 대학의 로망을 이야기하는 이 장면은 어머니의 못 다한 꿈을 이뤄달라는 소망의 의미보다는 대학을 나와야만 대우를 받는 현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사회의 구조에서 남성의 경제적 속박과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어머니는 대학으로 보았고 은희는 이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모습을 보여준다.
  

<벌새> 스틸컷 ⓒ (주)엣나인필름

 
두 번째는 벌새다. 은희에게 큰 힘이 되어주는 영지는 오랜 시간 대학을 휴학했다 말한다. 시대상을 고려했을 때 영지의 휴학은 당시 대학 내에서 불었던 민주화 운동과 연관되어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영지는 삶이 힘들 때 손가락을 바라본다는 이야기를 한다. 손가락만은 내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희가 영지에게 불러주는 노래는 '잘린 손가락을 바라보면서'라는 가사로 시작된다.
 
영지가 차 한 잔과 함께 은희의 아픔을 들어주면서 해결을 위한 조언보다는 위로를 해준다는 점, 재개발에 저항하는 현장을 지나가며 그들 편에서 이야기를 한다는 점은 세상이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이겨내기 힘든 공간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지는 은희에게 '벌새 같은 삶'을 살아가라 이야기한다. 더 이상 맞지 말고 맞서 싸우라는 영지의 진심어린 조언은 제목인 벌새의 의미와 맞닿아 있다.
 
벌새는 작고 귀여운 외모와 달리 공격적인 성향을 지니고 단독 생활을 한다. 또 몸 빛깔에 있어 암수가 비슷한 종이 많다. 영지는 시대의 여느 여성들처럼 가부장적인 폭력과 억압에 노출된 영지에게 이와 맞서 싸우고 스스로를 지켜내라는 인생의 조언을 건넨다. 이는 영지가 살아온 길이자 앞으로 영희가 가족 안의 여성이 아닌 주체적인 한 인간으로 세상에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다짐이라 할 수 있다.
  

<벌새> 스틸컷 ⓒ (주)엣나인필름

 
세 번째는 성수대교이다. 1994년에 있었던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인 성수대교붕괴사건은 너무나 빠르게 성장했기에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여겼던 대한민국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번지르르한 외형에 비해 내부는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었고 내면의 침식은 외부의 붕괴를 가져왔다. 은희의 가족은 떡 장사로 많은 돈을 벌었고 서울 중상류층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벌어온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외도를 눈감아 주었던 어머니의 모습처럼 교육신화에 매몰되어 대훈의 폭력에 눈을 감아주는 부모의 모습은 내적으로는 전혀 성장하지 못하고 썩어 문드러진, 겉으로만 사랑과 행복을 이야기하는 가족의 모습을 통해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조명한다. 성장과 성장에만 매몰된 채 그 내면의 관계를 보지 못하는 한계는 도입부의 장면을 통해 시각적으로 묘사된다.
 
은희가 집을 착각해 아래층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는 장면은 문명의 상징인 아파트의 문처럼 서로 한 건물에 살지만 서로를 향해 단단하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고도의 성장 속 가려진 인간소외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성수대교의 붕괴는 이 마음의 단절과 서로를 향한 몰이해가 얼마나 큰 슬픔과 비극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벌새> 스틸컷 ⓒ (주)엣나인필름

 
<벌새>는 혼란스러운 사춘기를 보내는 소녀의 내면을 보편적인 정서로 담아내면서 한 개인을 통해 당시 사회의 모습을 그려낸다. 감독은 당시의 의식과 사회상의 문제를 은희의 일상을 통해 그려내면서 따스한 위로와 함께 희망찬 미래를 그려낸다. 은희가 학원 책장에 걸린 책 중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를 고르는 장면은 영화 그 이후의 미래를 상상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안정된 생활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크눌프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 사이의 이해와 사랑을 이야기한 이 작품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의 가치와 상반됨과 동시에 작품이 지향하는 바를 함축적으로 담아낸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감독은 아픔만이 가득한 은희의 삶에 희망찬 미래를 불어넣는다. 이 희망찬 미래는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이기도 하다. 삶이란 돌이켜 보면 항상 맑지도 흐리지도 않던 나날의 연속처럼 보인다. 그 당시에는 억압과 고통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순간과 소중한 행복이라 여기지 못했던 순간들이 기억을 장식한다. 그래서 아픔도, 고통도, 잘못도 날이 흐리다고 하늘을 탓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내면에 간직한 채 살아간다.
 
작품은 그런 순간들을 품은 이들에게는 아픔을 향한 공감과 위로를, 그런 순간에 직면한 이들에게는 벌새처럼 현재와 맞서 싸우라는 조언을 건넨다. 보편적 개인의 오늘을 통해 시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말하는 이 작품은 한 개인의 성장담에서 담아낼 수 있는 감정과 경험을 이야기한다. 나조차 나를 사랑할 수 없었던 인생의 사춘기를 통해 같은 시대의 아픔을 품은 이들을 위로하는 이 작품은 어쩌면 올해 최고의 한국영화가 될 가능성을 품은 영화라 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준모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벌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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