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리스>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의 세계를 '디스토피아'라고 하면 지나칠까. 인물의 관계망 외에도 '사랑 없음'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들이 보는 TV에서는 전쟁과 그로 인한 수많은 사상자 수를 세고, 집을 잃은 난민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이것은 영화 내내 반복된 설정인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거나, 영상통화를 하는 쇼트 등과 어울려, 기묘한 역설을 이룬다. 그러니까, 인류의 생활은 차츰 진보하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도구는 많아졌지만, 정작 사랑은 어디에 있냐고. 안톤(제냐의 내연남)과 딸의 영상통화에서, 만나서 얼굴 보자는 아버지 안톤에게 '(자신은) 영상통화로 만족하다'는 딸의 대사는 이 설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이 세계에는 사랑이 없다. "사랑 없는 삶, 그렇게는 못살아"라고 말하는 안톤의 대사는 기실 이 영화 전체의 전언이다. 알료사는 바로 이 전언을 행동으로 옮긴 상징에 다름 아니다. 알료사 스스로 몸을 숨긴 것인지, 누군가에게 해를 당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사랑 없는 이곳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사랑 없는 세계를 세밀하게 그려낸 묘사도 인상적이다. 보리스와 제냐의 어긋난 관계를 수직-수평의 관계로 흥미롭게 묘사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출근하는 보리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가면(수직), 제냐는 지하철을 타고 옆으로 이동한다(수평). 한편, 알료사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제냐가 보리스에게 전화하며 둘은 옆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그 방향 역시 서로의 어긋난 방향이다. 여기서 각자 들고 있는 핸드폰 역시 다른 제품(삼성과 애플)으로 설정하면서 둘의 어긋남을 흥미롭게 표현한다.
많은 영화가 이른바 '타이틀 시퀀스'를 활용한다. 이것은 영화 전체의 프리퀼, 혹은 인물의 커버스토리 등의 의미로 주로 사용하는데, 이 영화에서 타이틀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구분되는 '타이틀 시퀀스'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그렇다면, 오프닝 시퀀스를 구분되는 시퀀스로 볼 게 아니라, 다음 시퀀스와의 맥락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영화의 처음은 눈 덮인 겨울의 나무를 비추는데, 이어지는 화면에는 계절이 바뀌어(아마도 가을로 보인다) 학교에서 하교하는 알료사가 나온다. 영화가 비추는 나무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한데, 영화의 끝이 동일한 계절의 동일한 나무를 비추며 끝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오프닝에서 나온 그 '나무'의 플래시백이 아닐까.
이 영화의 유일한 따뜻함... 감독의 의도
▲영화 <러브리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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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에서 사랑의 죽음을 목도하게 만드는 이 서늘한 영화에서 따뜻함은 아무래도 영화 외적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감독의 의도는 이 영화를 통해 우리 모두를 '소년 찾기'에 동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차갑고 쓸쓸한 세상에, 누군가의 생명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곳에 미미한 온기를 조금 더 할 수 있지 않겠냐고. 이 '사랑 없는'(Loveless) 세상에서.
얄료샤는 때로 그 나무에 몸을 기댔다. 카메라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데, 이것은 알료사가 나무를 보는 시점 쇼트다(영화는 나무를 비출 때마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본다). 그가 올려다보는 하늘엔 앙상한 나뭇가지 몇 개가 삐죽 튀어나 있다. 그땐 늦가을이어서 그랬다. 자신이 놓쳐버린 잎과 꽃을 아쉬워할 겨를도 없이, 어느새 겨울이 되어 나무 위엔 새하얀 눈이 올라왔다.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봄이 오면, 꽃은 하늘에서 열린다. 1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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