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결국, 파이는 생존한다. 어느 낯선 땅에 지쳐 쓰러졌고, 파이와 역경을 함께 했던 리처드 파커는 알 수 없는 숲으로 가버렸다. 모든 것이 사라진 후 파이만이 남았고 그를 발견한 사람들은 파이의 조난 이야기를 기록하려 파이를 찾아온다. 파이는 그들에게 앞선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려준다. 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들이 '믿을 만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재촉한다. 실제 벌어진 일이라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파이는 그들을 위해 인물들을 바꾼다. 얼룩말은 보트에 함께 타게 된 불교 신자로, 오랑우탄은 자신의 어머니로, 하이에나는 배에 있던 주방장으로, 그리고 호랑이 리처드 파커는 파이 자신으로 말이다. 인물을 바꾸니 이야기가 아주 다른 차원의 것으로 바뀐다.
관객 또한 이 부분에서 숨겨진 물음표가 우후죽순으로 살아나는 것을 느꼈을 것 같다. 그렇다면, 파이가 정말로 경험한 바다 표류 이야기는 도대체 무엇인가. 진짜 동물들과 함께 있었던 것일까,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것일까. 마지막에 와서 이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숨을 얻게 되고, 그 앞에서 관객들은 당황한다. 우리가 믿은 것은 무엇인가. 이성적으로 납득 되는 이야기인가, 감성적으로 믿고 싶은 이야기인가. 파이는, 모든 것은 우리 믿음에 달려있다는 말을 한다. 어떤 이야기를 믿고 싶은지는, 각자의 믿음에 달려있다고.
이야기적으로는 물음표를, 영상적으로는 느낌표를 찍게 만드는 영화
인간이 삶을 살아갈 때 만나는 것은 상황뿐만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이야기든, 내적 갈등을 겪는 이야기든, 누군가와 심하게 싸우는 이야기든, 그런 상황 안에는 반드시 스스로의 믿음이 존재한다. 외면하려 해도, 내가 믿고 싶은 것, 내가 믿으며 살아온 가치관 같은 것 말이다. 부정하려 해도 자신의 믿음과 신념은 자신을 살게 하는 동력이 될 수도 있다. 어떤 것을 믿든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겠지만, 삶을 살아가는 목표는 그런 것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단순히 삶을 연명해야 한다는 본능이든, 어떤 미지의 것을 탐험하고 싶어하는 이성적 사고든, 모든 건 자신의 믿음에서 출발한다. 정당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른 것 또한 없을 것이다.
신은 우리를 만들어 놓고 우리의 이야기를 구경만 하고 있을 지도 모르고, 어쩌면 신이란 것이 아주 없을 지도 모르고, 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애정하고 끊임없이 도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파이의 아버지가 어린 파이에게 호통쳤던 것처럼, 무언가에게 영혼이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보는 자기 자신을 느끼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봤다. 내가 보는 것, 내가 만지는 것은, 각자의 생명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내 믿음에서 시작돼 활기를 얻는 것은 아닌가. 내가 외면하면, 외면할 수 있는 하찮은 것이 되고 애정을 가지면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는 것 말이다. 철저히 나 중심의 사고로 돌아가겠지만, 그런 것이 결국 삶을 살게 하는 동력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보았다.
어떤 것에도 답을 줄 수 없었다. 그게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이 아닐까. 이야기는 끝났지만 더 긴 물음표를 남기고 떠난 작품. 앞서 소개된 이야기를 전부, 다 뒤집어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품. 파이의 인생은, 어떤 식으로 결말을 맺은 건지 알 수 없다. 분명, 관객들 모두 자신들이 편한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삶이 가진 매력은 그런 이중성일 것이다. 우린 모두 답을 내고 싶어하지만 절대로 답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감성이든 이성이든 단일한 하나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 것. 우린 모두가 지켜야 할 법을 기록했지만, 해석은 제각기 다 다를 수 있다. 성경 또한,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재해석 되곤 한다. 어쩌면, 이 삶이 끝나야 답에 가까운 무언가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