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용한 열정> 스틸 컷
(주)디씨드
나는 그래서 이따금 문학을 쓰는 작가들이 신기할 때가 있다. 이런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그들은 글 속에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담아낼까. 그렇다고 작가들이 혼란한 세상을 회피하고 홀로 유유자적 감상에 빠지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직면한다. 가장 정확하게 포착하고 언어로 풀어낸다. 앞서 언급한 모호하고 복잡하지만 제대로 적은 글들의 완벽한 예가 바로 위대한 작가들이 쓴 것들이다. 이런 글에는 부차적인 코멘트가 붙을 필요가 없다. 홀로 완벽하다. 또 다시 설명할 여지가 없다. 이런 작품을 읽을 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는 막막해지지만 독자로서는 행복함을 느끼게 된다.
영화 <조용한 열정>(2015)의 주인공 에밀리 디킨슨도 그런 작품을 썼던 사람 중 한 명이다. 나는 이 작품의 도입부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복음주의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던 마운틴 홀리요크 여성학교에서 1년이 흐르고 학교의 교사는 학생들에게 묻는다. 주님에게 구원받기를 원하는가? 그녀는 크리스천이 되어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오른쪽으로 그저 구원만을 원하는 사람은 왼쪽으로 가기를 명령한다.
하지만 디킨슨은 홀로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은 채 남는다. 깨닫지도 못한 죄를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다. 학교를 떠난 이후에도 그녀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본인의 영혼을 지키고 있느냐는 목사의 물음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겉과 내면의 독실함을 혼동하지 않는 것말하자면 영화 속 에밀리 디킨슨은 구원과 평온을 얻기 위해 하나님에게 의탁하지 않는다. 대신에 영혼을 지킬 미덕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행하고자 한다. 그 중 하나가 정직함이다. 수잔과의 한밤 중 대화에서 디킨슨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고 남들도 속인다, 그리고 그것은 최악의 거짓말이다. 디킨슨은 그런 거짓말을 하느니 자신의 인생이 하찮고 어떤 사랑은 빼앗겼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렇게 정신적으로 엄격한 것이 결코 행복을 대체해주지 못함도 받아들인다.
사실 목사는 그녀가 기도하지 않았을 때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고 협박했지만 사실 디킨슨에게 세상은 어느 정도 그러했을 것이다. 전쟁이 나 수만에 이르는 사람이 사망하고, 누군가는 세상에 맞추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심지어 이 모든 것을 제외하고도 우리가 천천히 전진해오길 기다리는 죽음이 있는 때로는 메마르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이 아연한 지옥.
이런 디킨슨에게 절친한 친구인 브라일링은 진실과 경험 없이는 그녀의 모든 맹세가 비겁한 짓이 될 것이라 충고한다. 세상과 등을 져선 안 된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독방에 가둔 사람의 정직함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실 디킨슨이 정신적으로 가장 의지했던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그녀는 집 밖은커녕 자신의 방에서도 나가지 않는다. 어찌 보면 그런 디킨슨의 모습은 칩거 혹은 은거에 가깝다. 세상으로부터 숨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디킨슨은 그런 자신의 행동을 아무도 모르게 하는 저항이라고 말한다. 남성과 동등해질 수 없기에, 그래서 사랑이든 아니면 어떤 식이든 관계를 맺는다면 억압받을 수밖에 없기에 이 현실에 맞서 그녀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자유를 지킨다. 이는 진압되지 않으면서 세상에 맞설 수 있는 은밀하고도 유일한 방법이다. 말하자면 브라일링의 충고처럼 디킨슨은 겉과 내면의 독실함을 혼동하지 않았다.
에밀리 디킨슨이 발산한 조용한 열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