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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창작 뮤지컬이 자주 받는 비판 중 가장 치명적인 내용은 아무래도 '국뽕(국가+필로폰)'이다는 말이 있겠다. 사실 뮤지컬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많은 영화와 드라마들이 실제 이런 비판을 받는다. 그에 비해 <서편제>는 불편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이를 드러내는 작품은 아니다. 국가주의, 민족주의적 정서 보다는 인간 보편의 삶을 이야기 한다. 물론 결국 동호가 '소리'로 돌아오는 것이 결과적으로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단순히 '한국인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어서 가지고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 추억, 굉장히 커다란 시간이었다는 점을 봤을 때 꽤 일리가 있다.
다만 구체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그리고 작품이 지닌 은유성을 보았을 때, <서편제>에는 분명 '국뽕'으로 읽힐 부분들이 존재한다는 건 아쉽다. 사실 <서편제>는 오히려 한국의 '잡탕'(극 중 유봉의 표현)적인 성격을 적극 긍정하고, 이 문화가 어떤 방향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제시할 수 있는 작품인데도 말이다.
유봉-송화-동호의 가족을 보라. 그들은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가 아니다. 전통적인 가족이었다면 동호와 송화는 배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성이 같은 남매여야 한다. 또한 오이디푸스라는 거대한 메타포로 읽힐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로 포괄되지 않는 어떤 특수성을 가진다. 예를 들어 유봉과 동호가 그러하다. 전통적으로 오이디푸스라는 남성 서사의 메타포는,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새로운 아버지(질서, 국가, 규칙, 권력 등)가 되고, 그것은 지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유봉은 온전히 오이디푸스적 단계를 통해 아버지가 되지 않았다. 그는 스승에게 쫓겨난 자다. 동호는 아버지를 꺾는 대신 도망쳤다. 그들은 순수한 전통적인, 전형적인 형태가 아니다. 이는 사실 한국이라는 문화적, 민족적 특수성과 맞닿는다.
우리는 교과서에서부터 전통적으로 '한 민족'을 강조하고 그 나름의 순수성을 설파한다. 하지만 수많은 침략 혹은 이주의 역사를 봤을 때 과연 한국이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가. 왜 그토록 순수성에 집착하는가? 그 속에는 순수성과 순수하지 못함이라는 이분법이 존재하고, 그 중우월한 것은 순수한 것이라는 전제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순수성에 대한 집착, 순수와 잡탕의 우월성을 전복시킬 수는 없을까? '잡탕이면 왜, 뭐가 어때서?'라는 질문으로 전복이 될 수는 없는 것인가? 순수성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제국주의적 혹은 전체주의적 논리였다. 그 논리를 차용하면서 '우리의 우월성'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한국 문화 보편에 깔려 있는 당연한 전제들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당연한 전제는, 한편으론 상상력을 제한한다. 그 의미를 좁게 만들고, 풍부할 수 있는 것들과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들은 하나의 정해진 '정답', 즉, '올바른' '우월한' 답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 경계가 허물어질 때, 무언가 탄생한다. 마치 뮤지컬 <서편제>의 전체를 관통하는, 오이디푸스적이면서 전통적이지만 온전히 그것만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이 가족처럼.
'인간은 운명을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도 그러하다. 사실 <서편제>에서 표면적으로 읽히는 답변은 '아니다'이다. 동호는 결국 돌아왔고, 송화는 떠나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돌아온 동호는 세속적으로 실패를 거두기도 했지만, 결국 레코드를 차리는 등 성공했고, 스프링보이즈는 재결합 공연도 한다. 성공적인 인생이다. 운명에 사로잡힌 인물들임에도 둘은 재회하며 행복해 한다. 그들은 운명을 온전히 이기지 못했지만, 운명도 온전히 그들을 무릎 꿇리지는 않았다. <서편제>가 가진 결말이 다분히 열린 결말이고, 다양하게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오로지 '한국인이기에' 돌아오는 동호로 제한하면, 이는 '인간은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에 굴복할 때 가장 행복하다' 더 나아가, '운명을 이기려 하지 말고, 주어진 대로 살아라'라는 비관적인 닫힌 결말로 이어진다. 비관적인 결말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의 풍부함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작품의 풍부함을 감소시키는 데에는 공식 자료들도 한 몫 했다. 보도자료 등을 뿌릴 때, 혹은 공식 홍보자료의 문구들을 보자. 예를 들면 동호에 대한 공식 페이지의 설명은 "판소리를 찾아 다시 돌아오는 한국인의 잃어버린 정체성"이다. 이 뮤지컬은 결국 '한국적인 것'에만 그치는가. 작품성을 떠나서 이는 상품성으로도 상당한 손해다. 이 뮤지컬은 충분히 해외에도 수용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 정서는 비록 완전하게 번역하기 어렵겠지만, 이 작품이 이야기하는 보편성이 분명 있다. 그러나 '한국적인 것'으로만 국한시키면 그 가능성이 줄어든다.
<서편제>가 '순수한' '우리의 것'을 설파하기엔, 일단 장르부터 '우리'의 장르가 아니다. 뮤지컬을 택했다. 판소리에 '서양적' 멜로디가 덧붙여진다. 심지어 마지막에 소리를 하는 송화 곁에서 북을 치는 동호는 양복을 입고 있다. 이 뮤지컬은 그야 말로 탈경계적이다. 유봉의 표현대로라면 '잡탕적'이다. 이는 단점이 아니라 이 뮤지컬이 지닌 가장 커다란 장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극 중에 묻어나는 순수성에 대한 집착은, 극의 형식과 메시지를 어긋나게 해 혼란을 남긴다.
윤리적으로도, 작품적으로도 아쉬운 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