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열전
극작을 공부하던 한 지인은, 실비아는 등장할 수 있는 '가장 잘 만든' 여성 캐릭터일 거라 얘기했다. 이해가 된다. 실비아는 분명 처음 등장했을 즈음의 시점에서 보면 획기적인 캐릭터였다. 1958년 이후 변화되는 그녀의 모습은 분명 '페미니즘적' 맥락을 지닐 수 있다. 남편인 필립과 친구 올리버의 행복만을 바라던 사람에서, 내가 제일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변하는 실비아. 또한, 현재 시대의 실비아는 기존의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던 방식, 남성 주인공과의 이성애 관계로 엮이지도 않는다. 이는 1958년도의 실비아와도 비교되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실비아를 보다 보면 여전히 찝찝한 기분이 남는다. 왜 그럴까, 스스로 생각의 꼬리를 물고 물었을 때 가장 거스른 대사는 바로 이 부분이었다.
"어, 근데 더 짜증나는 건 기지배들이 무슨 게이를 친구로 두면 지가 센스 있고 괜찮아 보이니까 자꾸 허영을 부려. 그! 그 XX할 놈의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이랑 <섹스 앤 더 시티>가 기지배들 다 망쳤어!"어떤 맥락에서 실비아가 이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겠다. 하지만 의도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 대사 자체가 깔끔해지는 것은 아니다. 저 대사 속 '기지배들'은 결코 좋은 맥락으로 이야기되지 않았다. 이는 실비아가 그 후의 대사에서 '걔네들 나쁜 애들 아니야'라고 변호한다고 해서 변하는 게 아니다. 한 개인의 값어치로 측정될 수 없는 가치, '프라이드'를 이야기하는 연극 <프라이드>에서 이런 대사가 사용됐다. 올리버를 '도맷값에 팔고', '물건에 대한 취향 그거로만 정의를 내리고 가치를 매기는' '기지배들'은 상당히 비하적인 맥락이다. 특히 올리버와 같은 게이들을 벽지도 잘 골라주고, 쇼핑도 같이 다녀준다는 이유로 친구로 사귄다고 이야기하는 그 기지배들은 더더욱.
나는 이 실비아의 대사를 통해서 왠지 익숙한 화법을 기억해냈다. 오늘날 소위 '명예 남성' 같은 단어로 불리는 사람들의 화법과도 비슷하다. 물론 온전히 실비아를 그 '명예 남성' 부류의 여성 인물이라 정의할 수는 없다. 올리버가 게이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퀴어 프렌들리'한 이성애자 여성 인물이라고 옹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 대사 속에서 실비아는 퀴어 프렌들리할지는 몰라도 여성 혐오에 대한 인지는 부족한 것 같다. 저런 식으로 '기지배들'을 '후려치는' 것은, 일종의 '김치녀 신화'를 연상케 한다.
만들어진 서사 속의 캐릭터는 실제의 한 사람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캐릭터는 의도적으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만들어졌다.' 그러기에 어떤 서사를 봄에 있어서 기존의 여성성을 정확히 수행해내는 캐릭터는, 그 맥락을 따져보고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그게 소위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으로 넘어가더라도 말이다. 서사를 볼 때 우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 창작자가 기존의 여성성을 재생산해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실비아는 여전히 여성성에 갇혀있다. 1958년도의 실비아는 철저히 여성성을 수행하고 있다. 그녀는 아이를 갈망한다.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남편 필립의 곁을 지키고 올리버를 미워하지도 않는다.
현재의 실비아는 뭐가 그렇게 다른가. 그녀는 열심히 그리고 철저히 헤테로 여성으로서 남자 친구를 사랑한다. 그녀가 올리버에게 하는 대부분의 대사는 마리오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그게 아니라면 올리버가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도와주는 대사뿐이다. 그뿐인가. 실비아는 여전히 아이를 갖길 원한다.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아이기에, 그게 신이 자신에게 주는 축복이라면 감사히 기쁘게 받겠다고 한다. 물론 실비아가 실제의 삶에 존재하는 여성 1이라면 그녀는 그냥 아이를 정말로 좋아하여 엄마가 되기를 바라는 여성 1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비아는 서사 속에서 만들어진 인물이다. 아무리 현실적인 인물이라 해도, 그녀는 허구성을 통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인물이다.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과 인권도 바뀌는 현재의 시점에서, 실비아가 꼭 그렇게 말하고 행동해야 했을까. 여성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은 '아이'라고, 또 한 번의 어머니 성을 재생산해낸 건 아닐까.
1958년도의 실비아는 '성녀'였다. 그렇다면 2017년도, 현재 실비아의 모습은 달라졌는가. 나는 실비아의 모습을 '확장된 성녀상'에 포함된다고 정의하고 싶다. 그녀는 여전히 올리버와 필립을 돕는다. 혼자 여성 인물이고 그 속에서 타인에게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1958년도의 실비아가 마지막으로 하는 독백에서도 이어진다. 그녀는 지독한 우울감에 시달리지만, 필립과 올리버에게는 '괜찮아요'라고 위로한다. 왜 홀로 존재하는 여성 인물을 그런 식으로 설정했을까. 그야말로, '괜찮다' 같은 말은 부드러움 등을 오랜 시간 상징해왔던 '여성성'을 수행해온 '여성' 인물이 해야 한다는 발상이 아니던가.
현대 실비아와 필립, 올리버의 일종 연대로 비칠 수도 있겠다. 젠더 권력을 지니지 못한 여성과 성 소수자인 두 인물의 연대 말이다. 그런데 왜 그 연대는 여성 인물이 '괜찮다'라고 위로를 하며, 두 사람의 연애를 자신의 연애까지 뒷전으로 하며 도와야 이뤄지는가. 왜 유일한 여성 인물로 설정된 실비아에게 그런 역할을 부여했고 설정했는가. 왜 여전히 2017년 실비아의 중심 서사는 올리버를 돕는 것일까.
<프라이드>의 가치, 그리고 더 나은 <프라이드>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