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속의 여성여성의 이야기를 전하는 목소리도 여성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 속에서, 여성은 철저하게 대상화된다. 그리고 명명된다. 'XX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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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헤모스>가 가장 놀라웠던 점은 이 베헤모스 같은 사회 속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객체화되는지, 또 여성 혐오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정확히 보여줬다는 점이다. 공연에선 여성들이 어떤 식으로 미디어에서 다뤄지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어떤 성폭행이나 살인 사건 등이 존재했을 때 그녀들은 '꽃뱀' 같은 소리를 먼저 듣는다. 그녀가 범죄의 피해자여도 말이다. 그 순간 살해당한 여성은 '죽어도 싼 꽃뱀'이 되는 것이고, 남성은 '해야 할 도리를 한' '되려 불쌍한' 사람이 된다.
이는 사회의 흔한 여성 혐오를 그대로 드러냈다. 각종 범죄의 피해자가 된 여성은 매체나 여론, 미디어를 통해 또 한 번 폭력에 노출된다. 그녀들은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꽃뱀이라는 식의 비난을 받거나 성희롱당하기도 한다. 결국 <베헤모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민아는 마약을 한 꽃뱀으로 전락했다. 살해당한 서민아는 '스위트룸녀', '커터칼녀', '마약녀'로 불린다. 하지만 한태석은 어떠했던가. 한태석은 그런 꽃뱀에게 발목 잡힌 불쌍한 명문대 모범생으로 이야기됐을 뿐이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여성 인물들을 멀티 역의 배우가 모두 소화한다는 점이 인상 깊다. 사실 연극에서 멀티 캐릭터의 활용은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인원을 가지고 공연을 해야 하기에, 다른 영화 등에서는 볼 수 없는 연극만의 매력이다.
이는 연출적으로 꽤 많은 바를 시사한다. 여성 멀티 배우는 극 중에서 서민아, 뉴스 리포터, 법의관을 모두 소화해낸다.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무대 뒤편의 호텔 1103호의 피투성이 침대에서 누워있던 서민아가 일어나 옷을 입고 다시 리포터나 법의관이 된다. 사회 속에서 여성들은 21살의 서민아이든, 뉴스의 리포터이든, 법의관이든 모두 그저 하나의 '여성'으로 기능한다. 극 중 남성 인물들은 여성을, 죽은 여성을 교환하고 거래하면서 그들 남성들 간의, 혹은 남성들만의 이야기를 쌓아간다. 여성의 죽음으로 그들의 권력과 힘, 그리고 입지는 달라진다. 그들에게 여성과 여성의 죽음은 그들의 권력을 쟁취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그 여자가 한태석의 어머니였든, 오진욱의 동생이었든, 혹은 서민아였든 말이다. 그들은 '죽은 여성'이라는 하나의 공통점으로 기능했다.
이는 마지막 결말에서 정의의 여신상이 되어버리는 멀티 캐릭터에서 또 한 번 드러난다. 그녀는 마치 서민아가 죽기 전 한태석과 호텔 1103호에 들어갔던 것처럼, 호텔에 들어간다. 그녀의 눈에는 검은 천이 둘려있다. 그녀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녀는 그 상태로 이제는 부장검사가 된 오진욱의 책상 위에 올라간다. 그녀는 여전히 서민아가 입던 옷을 입고 있다. 그녀는 또 다른 '서민아'였다.
사회에 의해 '꽃뱀'이라는, 이른바 '창녀'로 분류되는 여성과 '정의의 여신상'이 되어버린 여성을 한 배우가 보여준다. <베헤모스>는 창녀/성녀의 이분법적인 사고관을 폭로한다. 결국, 여성이 창녀이든 성녀이든, 그녀가 꽃뱀이라 비난받든, 여신이라 칭송받든 이는 모두 여성이 객체화되는 방식이다. '꽃뱀'으로 그려지는 서민아는 죽었고 한태석의 기억 속에서만 발언권을 가진다.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리고 침묵한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 주체가 되지 못한 채, 객체로 존재한다.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뤘는데, 여성은 이질적으로 그저 '여신'으로 존재한다.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못 한 채로, 상황을 자조하는 듯 웃으며 말이다.
멀티 캐릭터가 정의의 여신상이 되기 전, 그녀는 뉴스 리포터로서 이 변호사가 '무죄'로 판결 났다는 사실을 전한다. 더불어 그 '무죄' 판결로 남성들끼리 행정 소송을 걸고 재심 요청을 하는 것 따위 또 하나의 '남성들끼리의' 쟁취, 싸움을 이야기한다. 남성들의 이야기를 하며, 그녀는 운다. 겨우겨우 말을 이어간다. 그 순간은 100분 동안, 정말 처음으로 그 '여성'의 목소리가 극장에 퍼져 울리는, 더 나아가 사회에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조차도, 그녀가 하는, 그리고 해야 하는 이야기는 결국 남성의 이야기였다. 이 신에서 관객들, 특히 여성 관객들은 수많은 여성 혐오 범죄와 그 범죄가 다뤄지고 보도되는 방식, 그리고 사회에서 받아온 여성으로서의 억압을 상기하게 된다. 그 순간 그녀는 뉴스를 보도하지만 동시에 이 땅의 수많은 여성을 대변하는 존재가 된다.
또한, 여성 혐오적 사회를 드러내기 위해 <베헤모스>가 던지는 유죄와 무죄에 대한 질문도 인상 깊다. 극 속에서 한태석과 이 변호사, 그리고 이사장은 한태석의 '무죄'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유죄와 무죄. 그 단어 자체는 죄가 있다/없다를 각각 지칭한다. 하지만 정확히 하자면 유죄와 무죄는 이는 '법정에서 판결된' 죄가 있다, 없다를 의미한다. 더 나아가, 어떤 끔찍한 죄를 저질러도 법정에서 인정되지 않으면 그 죄는 무죄이다. 그 죄가 설사 살인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베헤모스, 관객들을 갖고 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