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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과거를 지닌 남자, 그가 인생을 살아내는 법

[리뷰]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17.02.27 18:52최종업데이트17.02.27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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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흐르는지 흐르는 않는지 분간할 수 없는 고요한 바다의 물결처럼 카메라는 주인공 '리'의 일상을 훑는다. 건장한 청년이 하기에는 비루해 보일 수 있는 건물 관리인으로 살아가는 '리'는 지하의 작은 원룸에 살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술집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자에게 눈빛 한 번을 안 주더니, 혼자 잔뜩 취해 맞은 편에 있는 사람에게 이유없이 시비를 거는 삶. 건조하고 무의미하며 어쩌면 사회 부적응자처럼 살아가는 리에게 형의 죽음이 불현듯 찾아온다. 

누군가에는 삶의 큰 파편음일 수 있는 형의 죽음이지만 리는 그마저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그의 서툰 감정표현이 무엇 때문인지 의아해하지만 감독은 적극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저 매일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처럼 아무일 없다는 듯 장례 절차를 준비하는 리의 모습을 응시하게 만들 뿐이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은 리의 삶이지만, 예상치 않은 곳에서의 감정적 동요가 그의 일상을 뒤덮는다. 형의 장례를 준비하면서 찾아가게 된 고향 맨체스터. 오래 전부터 그가 속해 있던 고향이 환기시키는 기억과 파편들은 형의 죽음보다 더 잔혹하게 불쑥불쑥 그의 일상을 파고든다.

형의 죽음

형과 동생 ⓒ 더픽처스


맨체스터에서 오버랩되는 과거의 기억들은 지금의 리의 모습을 거짓말로 만든다. 햇살이 비치는 침실에서 보내는 아내와의 행복한 시간. 친구들과 행복한 한떄를 보내며,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두 딸을 키우는 가장. 현재의 리를 찾아온 과거의 리는 밟고 감정 표현에 적극적이다. 하지만 아름답고 행복한 기억은 금세 증발한다. 의도치 않은 실수로 인해 자신의 집을 태운 방화범으로 그리고 그곳의 아이들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로. 스스로는 스스로가 지은 죄를 알지만, 경찰과 제도는 의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 아직 용서받지 못한 죄가 서려 있는 곳. 고향 맨체스터는 그에게 그런 공간이다.

공간에 서려 있는 리의 과거를 본 관객들에게 이제 더 이상 그의 현재 삶이 무의미하지 않다. 앞서 보여준 건조하고 무기력한 태도는 무엇으로 씻고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을 과오를 가진, 그 무게와 책임을 알고 있는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무심해 보이던 리의 수면 아래에는 누구도 볼수 없었던 치열한 몸부림이 존재했다. 영화의 카메라는 마치 중대한 사건의 범인을 찾아가듯 지금의 주인공을 만든 내적 진실을 향해 나가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외부요인이 아니라 리의 가슴 속에 존재하는 심리적 사실이란 것을 알았을 때,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충격은 더욱 큰 파장을 일으킨다.

주인공 리 ⓒ 더픽처스


리가 간직하고 있던 가슴 속 진실을 추적하던 영화는 뜻밖의 딜레마적 상황을 그에게 전한다. 심장마비로 떠난 형의 장례를 준비하던 중 리는 형이 아들 '패트릭'의 양육인으로 자신을 지목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리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패트릭의 양육인이 된다는 것은 죽음보다도 슬픈 아픔이 서려있는 고향에 살아야한다는 뜻이기 떄문이다.

하지만 패트릭과 보내는 시간이 나쁘지만은 않다. 불가항력적 상황이지만 패트릭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꽁꽁 얼어붙어 있던 리의 마음은 서서히 열린다. 오래된 추억이 서려있는 형의 배를 고치고, 패트릭을 돌보면서 리는 다시 한번 일상적 삶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지독하리만큼 기억하기 싫은 고통을 공유하는 전처와 만나는 순간, 리는 모든 것을 해결하고 새로운 삶을 개척할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영화는 극적 플롯보다는 심리적 리얼리즘을 선택한다.

예상과 다른 결말

아내아 리 ⓒ 더픽처스


일자리를 구하면서 어느정도 고향에 정착하는 노력을 보이는 리이지만 우연치 않게 만나게 된 전처는 그의 삶을 다시 한번 붕괴시킨다. 함께 있던 친구를 보내고 대화를 시도하는 그녀는 하염없이 울며 지난날 그에게 뱉었던 가시 돋힌 말에 대한 용서를 빈다. 그녀가 과거에 어떤 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눈물의 농도와 리의 표정만으로 그 말들이 어떤 것일지, 가슴 속 리의 생채기가 어떠했을지 유추된다. 그 아픔만큼 애절하게 용서를 구하는 그녀이지만, 결국 리는 자리를 떠난다. 그것은 사과가 불충분해서 또는 사과를 받지 않아서는 아니다. 그저 리의 죄책감은 누군가에 의해서 용서될 문제가 아니기 떄문에, 아직 스스로가 스스로를 용서힐 준비가 되지 않은 아버지가 존재하기 떄문일 뿐이다.

피해자로서의 아픔과 동시에 피의자로서의 죄책감이 함께 다가오는 공간. 길만 걸어도 그 아픈 기억들이 상기될 수밖에 없는 장소. 리에게 고향 맨체스터는 더이상 정착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처와 아픔, 죄책감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올 수 있는 상흔의 기억이 묻힌 장소일 뿐이다. 그는 결국 사촌 패트릭을 남겨두고 떠나기로 한다. 주인공의 변화를 기대하고 영화를 줄곧 바라보던 나에게 영화가 보여준 심리적 리얼리즘은 조용히 전해져온다. 그 어떤 방식으로도 묻어지지 않을 아픔에 대해. 무엇으로도 해동되지 않을 죄책감에 대해. 극적이진 않지만, 작은 공간을 열고 다시 떠나는 리의 마지막 뒷모습은 그 어떤 극적 플롯보다 영화적인 우리의 삶을 전한다.

맨체스터바이더씨 케네스 로너건 케이시 애플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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