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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사구팽당한 KBL 비운의 스타 4인

간판 스타들의 갑작스런 트레이드 이적사

17.02.04 03:20최종업데이트17.02.04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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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T 유니폼을 입은 조성민을 이제는 볼 수 없다.
KT 유니폼을 입은 조성민을 이제는 볼 수 없다. 부산 KT

프로농구 부산 KT는 최근 간판스타 조성민을 전격적으로 트레이드시키며 화제를 모았다. KT는 조성민을 LG에 이적시키는 조건으로 포워드 김영환과 신인 1라운드 지명권을 얻었다.

조성민은 2006년 프로 데뷔 이해 10년 넘게 오직 KT 유니폼만을 입고 활약한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조성민은 2013년 FA 자격을 얻고도 팀 잔류를 선택하며 KT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평소 KT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의사를 공공연하게 표시해 왔고 은퇴한 뒤에는 KT에서 영구결번이 되고 싶다는 포부까지 밝혔던 조성민이기에 갑작스러운 트레이드는 큰 충격이었다.

KT는 리빌딩을 명분으로 제시했다. 팀성적이 몇 년간 계속 하위권이었고 조성민도 잦은 부상으로 경기에 꾸준히 나서지 못하며 새 판짜기가 불가피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트레이드 대상이 조성민보다 고작 1살이 어리고 연봉은 더 높은 김영환인 데다, 신인지명권 역시 2017년 신인드래프트가 흉작이 우려되는 상황임을 감안할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에 팀에 공헌한 베테랑 간판스타를 하루아침에 트레이드하면서 선수 본인의 입장이나 팬들의 여론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많은 팬들이 곱지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출범 20주년을 맞이한 KBL의 역사에서 이처럼 한때 잘나가던 간판스타들도 하루아침에 버림받는 모습은 결코 드물지 않다. 조성민과 마찬가지로 구단으로부터 토사구팽당한 비운의 스타들은 누가 있을까.

현주엽(1999년 SK→골드뱅크)

현주엽은 1998년 신인드래프트 1순위로 당시 청주 SK(서울)에 입단했다. 휘문고 1년 선배인 서장훈과 함께 '국가대표 트윈타워'가 프로에서 다시 한 팀으로 재회하며 많은 기대를 모았다. SK는 1999-2000시즌 당시 프로 최강팀으로 군림하던 대전 현대(현 전주 KCC)와 신흥 라이벌을 형성하며 양강 체제를 이뤘으나 정작 맞대결에서는 번번이 패하며 2% 부족함을 느껴야했다.

SK는 199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에서 전격적인 초대형 빅딜을 단행한다. 현주엽을 광주 골드뱅크(현 부산 KT)에 내주고 슈팅가드 조상현과 현금을 받아오는 트레이드가 성사됐다. 당시 SK가 선두권을 달리며 성적이 나쁘지 않았데다 당시 한국농구에서 현주엽의 위상과 잠재력을 감안하면 충격적인 트레이드였다. 하지만 현주엽은 프로무대에서 포지션과 에이스 역할이 겹쳤던 서장훈과 생각만큼 시너지효과를 내지못했고 최인선 감독과도 불화설이 나오던 상황이었다. 당초 삼성행 소문도 거론됐던 현주엽이지만 결국 트레이드 행선지는 골드뱅크였다.

SK는 트레이드 이후 약점이던 기동력과 외곽슛을 보완하며 그해 플레이오프에서 현대를 꺾고 창단 처음이자 유일한 우승을 달성했다. 현주엽은 골드뱅크 이적후 마침내 그토록 원하던 에이스 역할을 다시 차지할 수 있었지만 정작  팀은 플레이오프 진출조차 실패했다. 운명의 장난처럼 현주엽은 이후 은퇴할 때까지 우승은커녕  챔프전 무대조차 밟아보지 못했다. 당시 SK의 선택이 여러 가지 의미에서 프로농구 역사에 남을 트레이드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강혁(2011년 삼성→전자랜드)

'픽앤롤의 달인'으로 유명한 강혁은 99년 프로 데뷔 이후 10여년 넘게 줄곧 삼성 썬더스에서 활약한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화려한 슈퍼스타는 아니었지만 기복없고 꾸준한 실력을 바탕으로 삼성이 프로무대에서 거둔 두 번의 우승에 모두 기여했던 살림꾼이었다.

그러나 2010-2011시즌을 끝으로 삼성이 감독교체와 함께 리빌딩의 시기에 접어들며 강혁의 운명도 바뀌었다. 삼성은 강혁이 이미 전성기가 지났다고 판단하고 당시 이병석-김태형과의 2대 1 트레이드를 통해 가드진 보강을 노리던 인천 전자랜드로 이적했다. 당시 강혁은 은퇴까지 생각할 만큼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 트레이드는 삼성에 뼈아픈 실수로 돌아왔다. 김상준 감독이 이끌던 삼성은 그해 팀 역사상 최다인 14연패에 빠지는 수모끝에 9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기록이 중단되었고 그해 꼴찌로 시즌을 마감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맞이했다. 반면 강혁이 활약한 전자랜드는 그해 6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하며 대조를 이뤘다.

강혁에 이어 포워드 유망주였던 김동욱(고양 오리온)까지 트레이드로 내주는 자충수를 남발한 김상준 감독은 결국 1년 만에 경질당하며 삼성 농구사의 최대 흑역사로 남았다. 강혁은 2012/13시즌까지 활약하다가 은퇴했고 프로생활 내내 플레이오프에 빠짐없이 개근하는 명예로운 기록을 남겼다.

이상민(2007년 KCC→삼성)

KBL 역사상 가장 황당하고도 쇼킹한 이적 사례를 꼽으라면 아마 십중팔구는 이상민의 KCC행을 꼽을 것이다. KCC는 전신인 실업 현대 시절부터 삼성과는 전통의 라이벌 구도를 유지해왔고 양팀간에는 선수 이적도 드문 편이었다. 이상민은 1994년 실업 현대 입단 이래 KCC까지 팀 부동의 간판스타이자 대체불가한 아이콘으로 꼽혔다. KCC 미래의 감독은 이상민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상민은 운명의 장난처럼 선수생활 말년에 농구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이적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도 정식 트레이드도 아닌 FA 선수 지명에 따른 보상선수라는 황당한 방식이었다. 당시 KCC는 삼성에서 FA로 풀린 서장훈을 영입하면서 삼성에 보상선수를 내줘야했는데 보호선수 명단이 한 자리밖에 남지않은 상황에서 두 간판스타인 추승균과 이상민을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이상민을 선택했다. 당시 삼성이 이미 강혁-이정석 등 가드 자원이 풍부한데다, 나이도 많고 KCC맨 이미지가 강한 이상민을 지명할까하는 방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삼성은 지체없이 이상민을 선택했다. 사실상 이상민과 서장훈의 맞트레이드가 되어버린 모양새였다. 이상민은 당시 전력보강을 위하여 팀의 샐러리캡에 부담을 덜어주기 위하여 자신의 FA 몸값까지 양보한 상황이었다. 대학선배인 이상민과 뛰고싶다는 마음 때문에 KCC행을 선택한 서장훈의 입장 또한 난감해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KCC 구단와 허재 감독은 이상민의 팀내 영향력을 부담스러워하여 고의로 내보낸 게 아니냐는 팬들의 비난 여론에 한동안 시달려야 했다.

삼성 입단 기자회견에서 웃음꽃이 만발한 구단 관계자들과 달리, 마치 사형장에 끌려가는 듯한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이던 당시 이상민의 모습은 지금도 전설로 남아있다. 이상민은 그해 프로농구 4강전에서 친정팀 KCC를 상대로 맹활약하며 3전 전승으로 나름 복수에 성공했다. 시간이 흘러 KCC는 이상민의 은퇴 당시 그의 번호를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지만 이상민은 행사에 끝내 참석하지 않았다. 이후 이상민은 삼성에서 은퇴하여 감독직까지 오르는 등 '삼성맨'으로 완벽하게 거듭났다.

김승현(2011년 오리온→임의탈퇴→복귀후 삼성)

'천재  포인트가드'로 한 시대를 풍미한 김승현만큼 데뷔 당시의 임팩트가 화려했던 선수도 없을 것이다. 김승현은 2001년 대구 오리온스(현 고양)를 통해 프로에 데뷔하 이후 1년만에 신인왕-MVP-통합 우승을 이끌며 프로농구 판도에 일대 지각변동을 이끌었다. 그해 아시안게임에서는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한국농구의 금메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후 김승현이 건재했던 2007년까지 오리온은 7년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하며 구단의 전성기를 보냈다.

하지만 김승현과 오리온의 결별과정은 프랜차이즈 스타와 구단이 맞이할수 있는 가장 최악의 방식으로 파국을 맞이했다. 김승현은 2007년 이후 허리 부상으로 급격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오리온은 2006년 당시 FA 자격을 얻은 김승현을 잡기 위하여 이면계약까지 제시했으나 부상으로 하향세를 겪게되자 당초 계약을 부정하고 연봉삭감을 강행하려 했고, 김승현에 이에 반발하여 이면계약을 공개 폭로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김승현은 KBL 의결사항에 불복했다는 이유로 임의탈퇴 처분을 받았고 오리온 구단과는 임금체불 문제로 법정싸움까지 벌였다. 평행선을 달리던 양측의 갈등은 김승현이 2011년 1심 승소에도 불구하고 잔여연봉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오리온이 임의탈퇴를 풀고 다른 구단으로 이적시키는 것으로 극적인 합의에 도달했다. 김승현의 영입을 원하던 LG와 삼성 사이에서 최종적으로 삼성행이 결정됐다. 이 과정에서 LG가 오리온에 강력하게 항의하며 또다시 잡음이 한동안 불거지기도 했다.

김승현은 복귀한 이후 삼성에서 3시즌간 선수생활을 이어갔지만 허리 부상 후유증으로 기량이 쇠락하며 전성기의 모습을 재현하지 못하고 아쉽게 농구인생을 마감해야 했다. 오리온은 김승현과의 갈등 과정에서 보여준 갑질과 안하무인에 가까운 행태로 구단 이미지에 큰 먹칠을 하며 한동안 팬들에게서 적지않은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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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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