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스틸 컷
(주) 크리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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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로 부터 '나의 역사', 그리고 존재를 복원하다이렇게 영화는 '나'라는 존재를 통해 '고립적'인 현대인의 소묘를 촘촘히 그려낸다. '사물'과 '동물'로 둘러싸인 고립적 삶, 소통 불능이 된 가족, 단절된 사랑, 그리고 제한적 우정 등등. 그러니 당연히 시한부라는 선고를 받지 않았어도,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해 '회의'할 수밖에 없는 삶의 조건인 것이다. 가장 전통적인 국가였던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급격한 산업화, 현대화 과정에서 '원자화'되어 겪게되는 고통의 결과물로, '자살율' 1,2위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툰다는 건 따지고 보면 이상한 점이 아니다. '사물'과 '동물'로만 채워진 삶에 대한 적나라한 후유증인 것이다.
영화는 바로 그런 '고립된 개인'에 대한 적극적 변호를 대변한다. 제한적인 관계로 고립된 개인의 삶, 심지어 내일 죽는다해도 자신이 기억될까 의심되는 삶의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애쓴다. 그리고 그 정당성의 시작은 바로 나를 둘러싼 '사물'과 '동물'.
그래서 그저 '사물'이었던 전화는 되새겨 보니, 이제는 '남'이 되었던 한때 사랑했던 그녀와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메신저로, 홀로 남은 시간을 때우던 한때 좋아했던 영화는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우정의 표현으로, 그리고 '시계'와 '고양이'는 자신이 방기했던 '가족'을 복원시켜주는 매개체이자, 상징물로 새로이 자리매김한다.
영화 속 매개체이자, 상징물이 보여주는 것은 '퇴행적'이다. 과거의 연인, 한때 열렬했던 꿈, 그리고 해체된 가족, 그리고 이제는 그 모든 것을 '추억'으로조차 잊어버렸던 고립된 나, 하지만 그 '추억'을 영화는 '사물'을 통해 그리고 그 '사물'의 상실이란 블록버스터급 장치를 통해, 현재의 나를 채우는 존재의 일부로 복원시킨다. 현재의 내가 '원자화'된 채 삶의 의미를 상실했다 하더라도,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라고 위로를 전한다. 설사 지금 현재의 네가 의미없이 사라진다해도, '역사'로 인해 너의 존재는 충분히 가치있었다고 영화는 다독인다.
영화의 화법은 '퇴행'적이지만, 그 퇴행은 웅크리고 틀어박히는 퇴행이 아니라, 죽음조차 껴안을 수 있는 용기를 주는 퇴행이다. 결국 인간은 '의미'와 '관계'를 통해 존재를 설득당하는 바, 그것이 설사 현재가 아니라 해도, 지나온 인생의 아련한 추억의 한 토막이라 하더라도 그 역사로 인해 인생은 충분히 살만한 것이라고 <고양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은 역설적으로 말한다. '시한부'로 시작하지만 정작 영화가 말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그 삶의 찬가에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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