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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지, 이런 골키퍼 또 없습니다

[프로축구] 리빙레전드 김병지의 은퇴 선언... 이렇게 한 시대가 끝났다

16.07.22 15:43최종업데이트16.07.22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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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지 은퇴 발표 김병지가 19일 은퇴를 발표했다. 지난해 7월 26일 전남 광양시 금호동 광양축구전용구장에서 열린 2015 현대오일뱅크 K리그 클래식 23라운드 전남 드래곤즈와 제주 유나이티드의 경기에 출전한 김병지. 자신의 700번째 경기다. ⓒ 연합뉴스


'한국축구의 전설' 김병지가 35년간의 파란만장한 축구 인생을 정리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김병지는 19일 자신의 SNS에서 차분하게 은퇴 의사를 밝혔다.

김병지는 프로에서만 24년이 활약한 K리그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1992년 울산 현대를 통하여 프로에 데뷔한 김병지는 포항, 전남, 서울, 경남 등을 거치며 K리그 통산 706경기에 출전했다. 프로축구 통산 최다 출장기록이자 최고령 출전(45년 5개월 15일) 기록까지 모두 보유했다.

후배들의 모범이 될 만한 커리어

▲ 골키퍼의 슛 2015년 12월 27일 오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홍명보장학재단이 주최하는 한국 축구 올스타 자선축구 '셰어 더 드림 풋볼 매치 2015(Share the Dream Football Match 2015) 사랑팀과 희망팀의 경기. 후반전 사랑팀 김병지가 희망팀 골키퍼 서경석과 1대1 상황에서 골을 넣고 있다. ⓒ 연합뉴스


특수 포지션인 골키퍼는 필드 플레이어보다는 보통 선수생명이 긴 편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40대 중반까지 현역생활을 이어가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물다. 김병지와 1970년생 동갑이자 같은 해 프로에 데뷔한 네덜란드의 전설적인 골키퍼 에드윈 판데르 사르도 2011년 당시 41세의 나이로 은퇴했지만, 김병지는 그로부터도 무려 4시즌을 더 현역으로 활약했다.

심지어 현재 K리그에서 감독으로 활약 중인 노상래 전남, 김도훈 인천, 조성환 제주 감독 등은 모두 김병지와 동갑이다. 심지어 윤정환 울산 감독이나 올 시즌 중반 중국 장쑤 쑤닝으로 떠난 최용수 전 FC 서울 감독은 김병지보다 어린 후배들이다. 동시대를 풍미했던 동료와 후배들이 모두 은퇴하고 지도자로 승승장구하던 시기까지 현역으로 남아 K리그를 호령한 김병지의 자기관리와 노력이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새삼 돌아보게 만드는 장면이다.

무엇보다 김병지라는 선수의 가치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어쩌면 한국축구 역대 최초이자 최고의 '스타 골키퍼'였다는 사실이다. 예나 지금이나 골키퍼는 화려하기 어려운 포지션이다. 해외에서는 잔루이지 부폰(이탈리아)이나 이케르 카시야스(스페인), 마누엘 노이어(독일)같이 골키퍼로 슈퍼스타 대접을 받는 선수들도 흔하지만, 적어도 한국축구에서는 김병지가 사실상 골키퍼의 스타성이 주목받기 시작한 '원조'이자 지금까지도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김병지의 독특한 성장 환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김병지는 부산 소년의 집(현 알로이시오고교)을 졸업했으나 대학 진학에 실패한 뒤 한때 막노동과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테스트를 통해 상무 축구단에 합격했고, 프로에서는 드래프트 번외 지명으로 울산에 합류하는 등 시련과 극복을 거듭하는 잡초 같은 축구인생을 살아왔다. 이는 김병지에게 포기를 모르는 헝그리 정신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배짱을 심어줬다.

김병지는 항상 안정감을 최우선 덕목으로 여기는 골키퍼 포지션의 고정관념을 깨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골키퍼임에도 뛰어난 발재간을 자랑하며 종종 골문을 비우고 페널티 라인 밖까지 나와 공을 다루는 것을 즐겼고, 세트피스에서는 종종 공격에까지 가담했다. 챔피언결정전 같은 큰 무대에서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서기도 했다. 지금도 포지션 개념이 더 보수적이었던 과거에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성격만큼 외모도 튀는 것을 꺼리지 않아서 1990년대 장발을 뒤로 묶은 '꽁지머리'와 화려한 염색 등은 지금도 김병지의 트레이드 마크로로 회자한다. 당시 어린 선수들 중에서 김병지의 패션과 플레이스타일을 따라 하는 이들도 꽤 많았다.

이처럼 뛰어난 실력만큼이나 강한 개성과 엔터테이너 기질까지 겸비한 김병지는 한국축구 역사에서 과거나 지금이나 비슷한 유형을 찾기 어려운 독특한 스타일의 골키퍼라고 할 수 있다. 김병지는 전성기 시절 한국의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파라과이) 혹은 호세 레네 이기타(콜롬비아)로 불리기도 했는데, 공통점은 이들 모두 90년대 세계축구에서 독특한 기행과 쇼맨십으로 유명했지만, 무엇보다 실력도 출중했던 골키퍼들이라는 점이다.

김병지의 경력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울산 시절이던 1998년 10월 24일 포항 스틸러스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나왔다. 당시 1-1이던 후반 추가시간 김병지는 공격에 가담하여 직접 헤딩골을 성공시켰다. K리그 역사상 골키퍼가 공식 경기에서 골을 넣은 것은 김병지가 최초였다. 이 장면은 해외 언론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고, 김병지의 축구인생을 대표하는 결정적 장면이 됐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대표팀은 네덜란드, 벨기에, 멕시코 등과 함께 죽음의 조에 편성되어 조별리그 탈락의 수모를 피하지 못했지만, 김병지는 대회 내내 눈부신 선방을 보이며 외롭게 고군분투했다. 멕시코-네덜란드전에서 워낙 대량실점을 했던 탓에 저평가 받은 면이 있지만, 김병지의 동물적인 선방이 아니었다면 그보다 5~6골을 더 내줬을 것이라는 평가다.

아쉬운 모양새의 마무리, 그의 내일을 응원한다

▲ 부모 가족의 이름으로 대응할 것 김병지 (전남 드래곤스, 골키퍼)가 지난 1월 25일 오전 광화문 르미에르빌딩 에서 아들 학교폭력 사건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 선수는 이날 허위나 왜곡되어 유포된 사실에 대해선 반드시 진실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 연합뉴스


물론 김병지를 바라보는 시선이 늘 호불호가 엇갈렸다. 당시만 해도 튀려고 안달이 났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많았다. 특히 김병지의 축구인생에 최대 흑역사로 거론되는 장면은 2001년 거스 히딩크 감독 부임 이후 첫 국제대회였던 홍콩 칼스버그컵 파라과이전에서 무리한 드리블을 하다가 실수를 저질러 히딩크 감독의 눈 밖에 난 사건이다.

이후 김병지는 한동안 대표팀에서 제외됐고, 2002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최종엔트리에 다시 합류하기는 했지만 정작 월드컵에서는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이 사건의 임팩트가 워낙 컸던 탓에 팬들 사이에서도 한동안 김병지의 가치와 플레이스타일에 대하여 부정적인 선입견이 굳어지는 등 후유증이 꽤 컸다. 월드컵 준비 기간 내내 치열한 주전 경쟁을 펼쳤던 후배 이운재와는 '안정감'이라는 측면에서 이후로도 끊임없이 비교 대상에 오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김병지는 이후 더는 대표팀의 중심으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하지만 김병지가 본연의 임무에 소홀하고 마냥 튀기만 하려는 선수였다면 프로의 치열한 경쟁 세계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다. 김병지는 누구보다 축구에 대한 열정이 강했고, 팬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항상 고민하는 선수였다. 경기장 안은 물론이고 경기장 밖에서도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통하여 자신의 축구 철학과 인생노하우를 전파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김병지의 말년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직접적인 본인의 과실은 아니지만, 아들이 연루된 폭행 논란으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고 본인도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사건을 수습하느라 선수생활을 이어가는데도 직격탄을 맞았다.

김병지는 여러 가지 역경 속에서도 여전히 선수생활에 대한 의지가 강했지만, 자신을 원하는 구단이 나타나지 않아 결국 은퇴 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구단과 팬들의 성원을 받으며 화려하게 물러나도 모자랄 레전드가 자신의 SNS에 직접 은퇴 소식을 알려야 했던 모습은 많은 축구팬들을 짠하게 했다.

한국축구에서 골키퍼로서 김병지가 남긴 가치는 끊임없는 파격과 도전, 열정으로 요약된다. 이제는 그가 축구인이자 골키퍼로서 쌓아온 풍부한 경험과 노하우를 앞으로 지도자로서 그 위를 이을 제2의 김병지를 키우는데 요긴하게 쓰일 것으로 보인다. 축구선수로서는 물론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명예회복도 김병지의 인생 2막을 좌우할 중요한 요소다. 김병지의 축구인생은 여기서 잠시 멈췄지만, 이는 마침표가 아니라 새로운 도전을 위한 잠깐의 쉼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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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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