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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죽을 때도 서서 죽는다

[심리학으로 보는 영화] <대호>는 우리 민족 신화의 투영

15.12.29 11:55최종업데이트15.12.30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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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편집자말]
지금이야 비디오테이프가 완전히 사라졌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비디오테이프 없는 영상문화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테이프를 기기에 넣었을 때 우리가 어김없이 보았던 장면이 있다. 80년대 문화부(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 명의로 만들어진 영상이었다.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습니다…. 한 편의 비디오가 사람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호환(虎患)'이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왜 옛날에는 호환이 그리 두려웠을까.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남북한 전역에 호랑이가 출몰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궁궐에까지 나타나는 호랑이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호랑이가 흔했던 모양이다. 요즘 겨울철 먹이가 귀해지면 인가에 출몰하여 피해를 주는 멧돼지를 생각해보면 호환이 얼마나 무서웠을지 짐작이 간다.

박훈정 감독의 영화 <대호>는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의 장렬한 최후를 다룬다. 영화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몸무게 400kg, 꼬리 길이 1.2m, 몸 전체 길이는 3.8m에 달한다. 지금은 한반도에서 사라진 이 조선 호랑이를 박정훈 감독팀은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아주 실감나게 잘 구현했다. 영화 <히말라야>를 봐도 알 수 있지만 우리나라 CG기술의 발달이 눈부시다.

예로부터 호랑이는 영물(靈物)이다. 신령스러운 동물로 통했다. '백수(百獸)의 왕'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융 심리학자인 이부영에 의하면 호랑이는 '사랑과 희생의 열정'을 상징한다. '성스러움(Numinose)의 화신', '종교적 본능' 혹은 '영혼의 인도자(Psychopomp)'를 상징하기도 한다. 호랑이는 또한 은혜를 갚을 줄 아는 '보은(報恩)'의 동물이기도 하다.

보은의 동물

영화 <대호> 속 호랑이의 모습. 한반도 전역에 분포했던 호랑이는 일제의 소탕 작전 이후 '사실상' 멸종한다. ⓒ New


이 신성한 인도자인 호랑이는 박훈정 감독의 영화에서도 신수(神獸), 즉 신성한 동물로 그려진다. 조선 호랑이는 당시에 민중들로부터 '산신(山神)'이나 '산군(山君)'으로 추앙을 받았다. 우리 조상들이 산을 공동체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어머니의 넉넉한 품처럼 여겼다면, 그 산에 사는 호랑이는 우리를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다. 산의 군주였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일제시대라면, 공간적 배경은 경남 하동군을 중심으로 하는 지리산 일대다. 그러므로 영화 속의 주인공 대호는 지리산의 왕이다.

영화에서 일본으로의 귀국을 목전에 둔 일본군 관료 마에노조(오스기 렌 분)는 정통 조선 호랑이의 가죽을 가지고 가고 싶어 한다. 그는 일본군 장교 류소위(정석원 분)에게 호랑이 사냥을 명령한다. 류소위는 조선 최고의 명포수 천만덕(최민수 분)이 아니면 지리산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천만덕은 류소위의 말에 호락호락 넘어갈 태세가 아니다. 만덕은 일갈한다.

"어느 산이 되었건 산군님은 건드리는게 아니여!"

류는 할 수 없이 2인자 격인 구경(정만식 분)을 도포수(都砲手)로 하고 칠구(김상호 분) 등의 대원을 데리고 사냥에 나선다.

지리산 산군으로서의 대호와 조선 최고 명포수 천만덕 사이에는 숨겨진 은원(恩怨) 관계가 있다. 호랑이 사냥을 하는 과정에서 천만덕은 대호의 어미 호랑이를 쏘아 죽인다. 천만덕은 새끼도 마저 죽이자는 구경의 말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새끼 호랑이 두 마리는 살려준다.

이 중의 한 마리가 바로 훗날의 대호다. 대호는 만덕의 행위를 기억하고 있다. 나중에 대호가 만덕의 아들 석(성유빈 역)의 시체를 찾아 돌려주는 보은행위로 이어진다.

한편 세월이 흘러 다시 사냥에 나선 천만덕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오발탄을 날려 자신의 아내를 죽이고 만다.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만덕은 사냥을 그만두고 약초 채집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여기서 사냥이 대상을 죽이는(死) 행위라면, 약초를 캐는 것은 아픈 사람을 살리는(生) 행위를 상징한다. 이는 만덕의 아내를 위한 회개(悔改) 행위이자, 이때까지 죽인 호랑이에 대한 일종의 애도(哀悼)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대척점에 서는 아들

영화<대호>의 한장면. 조선 최고의 명포수 천만덕의 16세 아들 석이는 아버지와 대척점에 서게 된다. ⓒ NEW


동물세계에서 대호가 산처럼 굳건한 산군이라면, 인간세상에서 태산 같은 진중함을 지닌 이는 만덕이다. 대호-만덕은 병렬관계다. 그러나 혈기 방장한 만덕의 16세 아들 석은 이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가출하여 도포수인 구경의 밑으로 들어가 호랑이 사냥을 위한 행동대 노릇을 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들 석이는 대호를 산군으로서 섬기는 아버지 만덕의 대척점에 서게 되었다.

"잡을 놈만 잡는 것이 산에 대한 예의인겨!"

대호를 잡아 큰 돈을 벌자는 아들 석의 말을 이렇게 거절하던 만덕의 단호함도 소용이 없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열하고 잔악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조선 호랑이 대호를 잡으려는 일본군의 탐욕은 호랑이에게 동생을 잃고 복수심에 불타는 구경의 복수심과 합쳐지면서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나가 그만두라고 혔다!"

만덕을 사냥에 끌어들이려는 구경과 류소위의 회유는 일언지하에 거절 당한다. 게다가 구경은 최고의 포수 만덕에 대한 시기심에서 오는 열등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다. 구경의 이런 콤플렉스는 결국 만덕의 아들 석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새끼까지 미끼로 삼아 대호를 잡으려던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대호를 잡을 수 없게 되자, 마에노조는 대호를 잡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폭약까지 사용해 가며 대호의 은신처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벼랑 끝 전술을 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칠구를 비롯한 일부 포수들은 지리산 수호자인 산군 대호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받지만 무시된다.

조선 = 대호 = 만덕

영화 <대호>의 한 장면. 실제 역사에서도, 일제는 군 병력과 조선 사냥꾼을 앞세워 조선의 호랑이들을 소탕했다. ⓒ New


영민한 동물의 왕, 지리산의 군주 대호가 당하고만 있을 리가 없다. 대호의 격렬한 저항은 일본 군대를 궤멸시키다시피 하지만, 대호 역시 치명상을 입게 된다.

이제 대호도 돌이키기 힘든 지경에 이른 자신의 운명을 자각한다.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 대호는 조선 최고의 마지막 명포수 만덕의 총에 죽기로 결심한다. 물론 만덕도 자신의 총으로 대호를 안락사 시키고, 대호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대호가 자신에게 달려들게 유인하여 함께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다. 만덕과 대호는 무자비한 일본군대와 비열한 포수들의 총구에 무릎 꿇지 않고 자신들만의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일본 군대에 의해 강토가 유린당한 조선과, 호랑이  사냥과정에서 처자식을 잃은 만덕, 그리고 인간들에 의해 배우자인 암컷과 새끼를 잃은 대호는 동일한 처지다. '조선=만덕=대호'의 3자는 서로 동일시할 수 있는 심리학적 등가물(Psychological Equivalent)이라 할 수 있다.

심리학자인 칼 융은 "꿈은 개인의 신화요, 신화는 집단의 꿈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융의 말을 빌자면 영화 <대호>는 우리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조선 호랑이에 대한 한민족의 꿈을 이야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백의만족의 웅혼한 기백과 자긍심을 조선 호랑이에게 투영시킨 영화 <대호>의 스토리는 바로 우리민족의 전설이요 신화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사족1 : 나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절벽 아래로 투신하여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한 대호와 만덕을 보면서 문득 명성황후 민씨와 매천 황현과 민영환이 차례로 떠올랐다. 잘 알다시피 명성황후 민씨는 궁에 침입한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를 당하면서도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고 외치며 장렬한 죽음 맞았다. 민영환과 매천 황현 역시 각각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설움을 자결로 마감한 우국지사들이 아닌가.

사족2 : 대호의 죽음을 보면서 나는 '굶주려도 풀은 먹지 않는다.'는 맹호의 기상을 떠올렸다. 영화 속의 대호처럼 실제로 현실 속의 '호랑이는 죽을 때도 서서 죽는다'고 한다. 죽을 때조차 서서 죽는 조선 호랑이의 의연한 기백을 잘 보여주는 장면은 영화 <관상>에도 나온다. 이방원(이정재 분)이 보낸 자객의 철퇴에 맞아 절명하는 김종서(백윤식 분) 장군의 모습을 한재림 감독은 포효하며 서서 죽는 호랑이의 죽음에 비유하여 인상적으로 잘 영상화한 바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진국 시민기자의 페이스북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박훈정감독 최민식 호랑이 칼 융 심리학적등가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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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심리학자. 의학자) 고려대 인문 예술과정 주임교수 역임. 융합심리학연구소장(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현)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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