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문으로 들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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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정호 일가에 불청객으로 등장한 서봄으로 인해 금이 가기 시작한 한정호의 아성. 드라마는 이물질 같은 서봄을 소리 소문 없이 내치려다가 풍문 때문에 자신의 집안에 맞아들이고, 그녀를 이종교배의 교본으로 삼기까지의 이야기를 갖은 해프닝으로 끌어간다.
그리고 한정호 부부가 벌이는 엎치락뒤치락 해프닝의 맞은편에서, 쫓겨날 뻔하다가 겨우 며느리로서 생명 보전을 하고, 나아가 특유의 영민함으로 한정호 일가의 작은 마님으로 등극하게 된 서봄의 인생 역전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여기까지만 하면, 그 흔한 재벌가의 신데렐라 스토리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풍문으로 들었소>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한정호 일가의 작은 마님으로 자족하던 서봄이 자신의 권력이 결국 꼭두각시 같은 것이었다는 깨달음과 함께, 한정호가 '가솔'이라 지칭하던 집안사람들에게서도 작은 변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서봄의 작은 아버지 서철식, '한송'의 비서 민주영을 중심으로 윤제훈, 유신영 변호사가 합류한 또 다른 변화의 시작을 알린다.
마지막 회 텅빈 집안에 홀로 남겨진 한정호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정호, 이 갑중의 갑을 채우는 것은 결국 '을'이라는 것을 드라마는 증명한다. 그가 '갑'일 수 있는 것은, 그 '갑'의 권위에 굴복하고, 갑의 떡고물을 받아 챙기고, 갑의 그늘에서 자신을 죽이며 살아가는 '을'들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극중 가솔들의 파업 한 번으로 한정호 부부가 졸지에 자기 집을 버리고 나가야 하는 해프닝에서 알 수 있듯 결국 그의 강고한 성체 역시 '을'들이 없이는 존재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는 그저 엿듣는 사람들에서 점점 드라마의 중심부로 진입한 '가솔'들을 통해 '을'의 존재론적 정당함을 그려낸다.
이땅의 을들에게 '연대의 희망'을거기에 덧붙여, 포기하지 않는 싸움이 보여주는 가능성도 더한다.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폐인이 된 민주영의 오빠, 그리고 역시나 어깨가 꺽어진 서철식, 그들은 과거 한송이 책임진 재판의 희생자들이다. 재판은 종료되었지만, 그들의 상처와 고통은 끝나지 않은 현재형으로 그들 본인과 가족에게 드리워져 있다. 한송의 녹을 먹는 처지이지만 민주영은 그 현재형의 고통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밥벌이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한송에서 돈을 벌지언정, 그로 인해 자기 오빠의 고통을 상쇄시키지 않고, 싸움을 시작한다. 그녀로 부터 시작된 싸움은 서봄의 삼촌 서철식을 설득하고, 그리고 서봄, 한인상, 윤제훈, 유신영을 설득하여, 거대한 한송을 상대로 한 해볼만한 싸움이 되었다.
블랙 코미디로 시작된 드라마는 중후반부에 들어서 진지해지기 시작한다. 주인집 이야기를 엿듣고 뒷담화나 하던 을들이 이 집안에 이물질처럼 들어온 서봄과 함께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일을 꾸미기 시작한다. 감히 얼굴조차 마주보기 저어하며 '가솔'의 지위에 감읍하던 사람들이, 노동자'로서의 자신의 법적 존재를 인지하고, 당당하게 자기 존재론적 주장을 내세운다. 한송의 또 다른 '을'이었던 민주영을 비롯한 유신영, 윤제훈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들이 손을 맞잡는다. 그러자, 그저 한 사람으로는 무기력한 반발이었던 해프닝이 이제 해볼 만한 싸움이 되었다. 비록 겨우 엄청난 연봉을 뒤로 하고, 월급을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고, 먹고 살 일을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한정호의 눈치를 보던 때와 다르게 웃음이 절로 난다. 한정호의 거대한 집에 눌려 보잘 것 없던 서봄의 좁은 집이 이제 들끓는 사람들과 그들의 떠들썩한 웃음으로 들썩인다.
▲풍문으로 들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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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중의 갑 한정호에 대한 풍자와 조롱으로 시작한 <풍문으로 들었소>는 그렇게 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삶인지. 그리고 한인상, 서봄으로 시작된 이 이야기의 서두에서처럼, 이 땅의 젊은 사람들이 과연 어떤 삶의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답에 대한 예시를 <풍문으로 들었소>를 통해 모범적으로 제시한다. 아버지 세대가 사는 삶의 방식과 조금 다른 선택을 한다면, 손쉬운 출세가도가 아닌 길을 선택한다면, 그리고 노예와 같은 삶에 주저앉지 않는다면, 그리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끼리 손을 잡는다면, 어쩌면 우리가 손쉽게 '갑'이라며 포기해버린 거대한 성채조차도 무너뜨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마치 '한 뼘이라도 여럿이 손을 잡고,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절벽을 오르는 담쟁이'(도종환의 시 담쟁이 중)처럼 말이다.
물론 <풍문으로 들었소>가 제시한 답안은 너무나도 모범 답안이라,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6월 2일 자 정태인씨의 칼럼에서처럼, 정규직이 된다한들 30년을 모아도 집을 살까 말까한 시대, 하지만 그 조차도 상대적 실업률이 세계 최고인 나라에서 '차라리 혁명을 준비하렴'이라는 그의 말처럼 '고립된 을'로 숨죽여 쓰러지지 말고, 담쟁이처럼 절벽이라도 넘어 볼 가능성을 한번쯤 생각해 보게 한 것만으로도 <풍문으로 들었소>의 결말은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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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로 시작한 '풍문으로 들었소' 연대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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