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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급 2050원에도 배정남은 배정남이었다

[피플&피플] 남자들의 워너비 모델에서 배우로①

13.11.11 10:08최종업데이트13.11.11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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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겸 모델인 배정남이 17일 오후 서울 신사동 편집매장 커드에서 오마이스타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오마이스타 ■취재/조경이 기자·사진/이정민 기자| 2000년대 초반 한 포털사이트의 '미니홈피'가 전 국민에게 뜨거운 인기를 얻었을 당시, 스타일 좀 아는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가 보았던 배정남의 미니홈피를 기웃거렸다고 한다. 배정남은 모델로서는 다소 작은 177cm의 키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몸매와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배정남 폐인'을 양산할 정도였다. 그만큼 뭇 남성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그의 자연스럽고 감각적인 패션스타일도 좋지만, 다부지고 깡이 넘치는 눈매와 표정 역시 보는 이로 하여금 강렬한 매력과 아우라를 느끼게 한다.

포털사이트엔 그가 패션잡지 < GQ >, <에스콰이어>, <맥심>, <엘르걸>, <보그>의 모델이었고,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서울 컬렉션(SFAA) 모델이었다는 정보가 올라있다. 하지만 그의 스타일과 카리스마 외에 우리가 '사람' 배정남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배정남은 이제 모델에서 연기자로 변신해 2009년 SBS 드라마 <드림>, 2012년 영화 <시체가 돌아왔다>, 2013년 영화 <베를린>에서 강렬한 모습을 선보였다. 톱 모델로서의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하고 이제 배우로 도약하고 있는 배정남. 진짜 그의 모습을 들여다보자.

"중학교 들어가서부터는 거의 혼자 지냈습니다. 그때 꿈이 있었겠어요, 미래가 있었겠어요. 좀 외로움이 많았습니다." ⓒ 이정민


철 없던 방황기, 악과 깡이 가득찼던 시절이 있었다

배정남은 부산에서 나고 자랐다. 갓난 아기 때부터 어린 시절을 그는 외할머니 손에 키워졌다. 어릴 때 부모가 이혼했고, 어머니가 그를 외할머니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큰 이모, 작은 이모 집에서 키워졌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는 아버지와 연락이 닿아 함께 살게 됐지만, 지방을 돌며 전기배선을 까는 일을 해 한 달에 한 번 집에 들어올 정도라 얼굴조차 보기 쉽지 않았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부터는 거의 혼자 지냈습니다. 그때 꿈이고 미래가 있었겠어요? 외로움이 많았습니다. 남들은 다들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며, 부모님에 대한 원망도 많았죠. 중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습니다. 주방에서 설거지도 했고, 신문배달도 하고 여러 가지 많이 했지요."

공부는 거의 손에 대지 않았던 배정남이었지만, 그가 유일하게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체육과 미술. 미술은 어릴 때부터 100점을 맡곤 했다. 중학교 선생님이 배정남에게 예고를 가라고 할 정도로 미적 감각이 뛰어났다. 

"미술 시간 외에는 애들이랑 싸움박질 하고 술 쳐 먹고 담배도 피고 그랬죠. 근데 나중에는 그런 것도 싫고 그림을 너무 그리고 싶었어요. 정말 예고를 가고 싶어서 아버지한테 전화를 했는데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터에 아버지는 '공고나 가라'고 했었습니다."

미술은 어릴 때부터 100점 만점에 100점을 도맡아 했다. 중학교 선생님이 배정남에게 예고를 가라고 할 정도로 그의 미적인 감각은 뛰어났다. ⓒ 이정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결국 그는 부산공고에 입학하게 된다. 혼자 단칸방에서 지내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하지 못 하는 슬픔과 분노로 방황기에 접어들게 됐다.

"애들이랑 만날 수업 땡땡이를 치고, 선생님들이랑 싸우고 그랬어요. 공고에 가서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더라고요. 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외할머니의 병환에 정신 차려..."대학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배정남이 인생을 소모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됐던 계기가 있었으니, 자신을 어릴 때부터 키워주셨던 외할머니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그때 "빨리 정신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원래 취업생들은 3학년 2학기 때부터 현장을 나가는데 저는 1학기 때 공장으로 취업 나가게 해달라고 했었어요. 대학도 안 가겠다고. 시간 낭비 할 바에야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부산 옆에 양산이라는 곳에 있는 자동차 하청업체 공장에 들어갔어요. 2001년도에 시급이 2050원. 와, 이렇게 일이 그렇게 힘든데...진짜 너무 했죠."

공장에서 자동차 브레이크 부품을 만드는 담당이었던 배정남. 정말 온 몸이 부서져라 1년 정도 일을 했다. 그렇지만 정말 몸이 부서져 버려 결국 일을 계속 할 수가 없었다.

영화배우 겸 모델 배정남이 17일 오후 서울 신사동 편집매장 커드에서 오마이스타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와, 진짜 '돈 버는 게 쉬운 게 아니구나'를 그때 알았어요. 공장에 있는 누나들, 형들 다들 너무 순수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릴 때 사고도 치고 그랬지만 정신 차리고, 자신들이 낳은 애를 키우겠다고 거기서 일 하는 이도 있었어요. 저 역시 개념 없는 나쁜 친구들과 어울렸지만, 그곳 형들 누나들 보면서 나쁜 친구들을 다 정리했어요."

배정남은 남들보다 더 많이 더 열심히 일했다. 다른 취업생들이 한 달에 5,60만원을 벌 때 그 두 배가 되는 돈을 벌었다. 철야 근무에 주말도 반납하고 일했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작은 돈이지만, 일한만큼 돈이 나오는 공장에서 그는 진짜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 불현듯 불의의 사고가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볼트가 들어있는 박스를 트럭에서 바닥으로 내려야 하는데 의욕이 앞선 나머지 박스를 안고 트럭에서 점프해서 뛰어 내렸다는 것. 그때 허리에 '팍!'하는 느낌이 왔다. 바로 허리 부상이었다.

"다음날 너무 아파서 누워 있지도 못 하겠더라고요. 그런데 공장은 하루 쉬면 이틀치 월급이 빠지고, 몇 시간 지각하면 하루 월급이 빠지는 식이어서 도저히 빠질 수 없었어요. 하루 종일 서서 하는 직업인데 서 있지도 못 하니까 앉아서 하다가, 앉아서도 도저히 못할 상황까지 됐죠."

영화배우 겸 모델 배정남이 17일 오후 서울 신사동 편집매장 커드에서 오마이스타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그놈의 돈이 뭐라고 배정남은 병원비가 너무 아까워서 진료를 미뤘다. 엑스레이만 찍고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않았던 것. 1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의 허리는 여전히 좋지 않은 상태다.

"너무 몸이 아파서 공장을 하루 쉬어야 했는데, 당시에 대입 수능을 치면 공장에서 하루 빠질 수가 있었어요. 대학 보내줄 사람도 없었고, 붙을 리도 없었지만 수능 시험을 치러 갔고, 하루 종일 집에서 누워있기도 했어요. 시험은 그냥 친 거죠."

수능 시험 이후에도 몸이 너무 아픈 나머지 공장에서 산업재해보험을 받으려 했지만 공장에서는 모른 채 했다. 산재 인정을 통해 치료도 열심히 받고 공장 일도 열심히 하려고 했었지만 회사의 태도에 마음이 상했단다. 이듬해 2월에 그는 공장 일을 그만두게 된다.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하던 공장도 때려 치고 나니 정말 허탈했습니다. 바닥에 다시 떨어진 느낌이었죠. 한 달간 술을 퍼마시고, 방탕한 생활을 했죠. 막상 3월이 다가오고 나보다 못난 애들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대학 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격지심도 쌓이고 엄청 부럽기도 했어요."

수능시험은 쳤기에 낮은 점수지만 점수는 나왔던 터였다. 남들 부러운 마음에 부모님 몰래 패션디자인학과가 있는 세 군데 대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다 떨어진 줄 알았는데 한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2시간 안에 등록금을 넣으면 합격이라는 소식이었다. 추가 합격이었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모은 돈이 약 130만원 있더라고요. 학비는 262만원. 132만원이 모자란데, 학교에는 '빨리 돈 갖고 가겠다. 뒤에 사람한테 연결하지 말라'고 하고 제일 먼저 아빠한테 전화를 했어요. 아버지는 제게 군대나 가라고 했죠. 말이 통하지 않았어요."

이후 어머니한테 외삼촌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때 배정남은 "옷을 사달라는 것도 아니고 대학 등록금 절반만 보태달라는 건데 다들 거절했다"며 "그땐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며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공장에서 일하고 통장에 130만원 있더라고요." ⓒ 이정민


그때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이 있었으니, 당시 경찰학과에 붙은 제일 친한 친구였다. 공장에서 일했을 당시 만 18세가 돼 신용카드를 만들 수 있었고 그 친구는 신용 카드로 돈을 긁어 262만원을 빌려주었던 것이다.

친구의 카드빚까지 져서 가고 싶었던 대학에 갔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책값이며 재료비 등이 계속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등록금만 있으면 다 될 줄 알았지만 도저히 다닐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요. 나이 먹어서 대학을 다시 가야겠다고 다짐하고 돈을 환불 받으러 갔는데, 돈 낸지 30분밖에 안 됐는데 반만 돌려준다고 하는 거예요.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그런데 총장님이 오셔도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시급 2050원에 노가다를 뛰면서 모은 돈. 진짜 그때는 눈에 봬는 게 없을 정도였습니다."

규정상 한달 동안은 반값 환불이 유효했기에 130만원이 아까워서라도 한 달은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던 배정남. 그렇게 딱 한 달 대학생활을 했던 그는 4월에 학교 문을 나서면서 "내가 너그들보다 잘 돼서 보자"며 등록금의 절반을 받아 나왔다.

"나중에 모델이 되고 좀 알려지고 하니까 그 대학교의 패션디자인학과 교수님이 잘 돼서 보기 좋다고 '강의 하러 오라'고 이야기했어요. 안 갔습니다. 제가 힘들 때 도와줬으면 갔겠지만 그렇지 않았잖아요. 학교에 어떻게든 다니라고 했던 교수님도 아니었고..."

* 배정남의 이야기 다음 주에 계속 이어집니다.

"중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습니다. 주방에서 설거지 등을 위주로 했고 신문배달도 하고 이거저거 많이 했지요."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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