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할배'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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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하다 하다 노령의 연기자까지 예능 프로그램에 끌어들이는구나 했다. 새로운 예능에 대한 갈구가 무리한 발상으로 이어져 도를 넘어선다고 생각했다.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 평균 나이 76세인 이들이 떠나는 배낭여행이라. 그것도 파리와 스위스를 거치는 열흘 동안의 유럽 배낭여행이라니. 5일 방송된 tvN <꽃보다 할배>는 새로움보다는 불편함이,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아무리 KBS 2TV <해피선데이-1박2일>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나영석 PD라고 해도 케이블에서 프로그램을 띄운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어깨에 짊어진 부담감이 여간 무겁지 않았으리라. 아직 케이블에서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은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이 나온 적이 없으니 말이다. 자칫 잘못하면 실력 있는 PD가 허무맹랑한 무리수에 무너졌다는 쓴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다. <꽃보다 할배>는 생각하면 할수록 불안한 요소들이 산재해 있었다.
하나 <꽃보다 할배>가 보여준 힘은 대단했다. 단 1회 만으로 모든 염려를 불식시켰고, '역시 나영석 PD'라는 탄성이 나오게 했으며, 케이블이라는 조건의 열악함을 잊게 했다. 누가 뭐래도 요즘 떠오르는 예능 프로그램은 MBC <진짜 사나이>와 <아빠 어디가>다. <꽃보다 할배>는 이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스타 MC를 내세우지 않고 힐링을 기본으로 하면서 재미와 감동을 황금비율로 맞춰나가는 프로그램 트로이카가 형성됐다.
<꽃보다 할배>는 신선한 재미와 웃음을 제공한다. 일단 '캐스팅'이 끝내준다. 이들이 벌이는 '해프닝'은 재미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조율하는 '디렉팅'이 훌륭하다. 어떤 예능이든 첫 회는 우왕좌왕하고 엉성하기 마련인데, <꽃보다 할배> 는 첫 회를 무의미하게 흘려보내지 않았다. 이 세 가지를 기가 막히게 조합해 옹골찬 예능의 진수를 확실하게 보여줬다.
<꽃보다 할배>의 주인공들은 웬만한 중견 배우도 따라잡기 어려운 수준의 포스와 카리스마를 지닌 고령의 연기자이다. 이들의 등장은 시시한 아이돌이나 식상한 개그맨보다 훨씬 새롭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첫 회부터 캐릭터를 완벽하게 찾았다는 것이 기이하기만 하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혼자 길을 찾아 나서는 급한 성격의 큰형님 이순재. 화끈함과 귀여움, 거기에 엉뚱함까지 더한 둘째 신구. 서열을 정리하고 무게 중심이 되는 점잖은 기둥 박근형. 장조림 통을 발로 차는 돌발 행동으로 성격을 드러낸 막내 백일섭까지. 밋밋한 캐릭터는 없다.
여기에 이서진이 방점을 찍는다. 써니, 현아와 여행을 간다는 소식에 싱글벙글 따라왔건만 네 명의 대선배님, 아니 선생님을 모실 운명이라니. 표정은 압권이었고, 어이없는 실소에 뒤로 넘어갔다. 그런데 그들과 어울리는 이로 이서진만 한 사람이 없어 보인다. 그 역시 예능 초짜고, 이런 콘셉트로 여행을 간 적도 없는데 말이다. 이서진은 <꽃보다 할배>를 통해 이서진은 핫한 인물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별것 없을 거란 그들의 여정에는 의외의 해프닝이 숨어있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이순재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앞서서 인도할 줄 몰랐고, 신구가 강제와 회유를 써가며 제작진과 여행경비 협상을 해낼 줄 몰랐으며, 박근형과 백일섭이 여행 일정에 대해 열변을 토할 줄 몰랐다. 하루 만에 녹초가 된 이서진의 힘겨운 여정도 놓쳐서는 안 된다. 지루할 것 같다는 생각은 그저 편협한 사고에 지나지 않은 듯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격하게 칭찬하고 싶은 것은 나영석 PD의 디렉팅이다. 이제 그의 얼굴은 <1박2일>이 아니라 <꽃보다 할배>가 됐다. 목숨을 걸고 성공해야만 하는 분신 같은 예능 프로그램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열정 어린 자세가 유난히 남달라 보인다. 연기자 선생님들을 모신 나영석 PD는 지시가 아니라 섬김으로 그들을 대해야 한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프로그램을 위해서는 침대에 카메라를 설치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백일섭의 한 마디에 나영석 PD는 군말 없이 모든 카메라를 철수했다. 공항에서 여행에 관련한 설명을 할 때도 나영석 PD는 무릎을 꿇고 그들의 눈높이보다 낮은 위치에 자신의 시선을 뒀다. 어른들을 모시고 예능을 만든다는 것에는 이러한 불편함도 따른다. 하지만 이를 자천한 나영석 PD는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며 프로그램의 격을 살렸다.
빠듯한 여행경비를 쥐어주고 호텔이 아닌 한인 민박을 숙소로 정하고 자세한 정보는 그 누구에게도 제공해주지 않는 점은 그들의 여행을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상황이며, 철저한 시뮬레이션을 통한 디렉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턱없이 무모하지는 않게, 그러면서 당혹스러운 처지는 그대로 유지했다.
<꽃보다 할배>에는 자극적인 장면도 없고, 과장된 리액션도 없으며,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위험천만한 설정도 없다. 그저 평균나이 76세 할아버지들의 자연스러운 유럽 여정이 있고, 그들의 진솔하고 담백한 담소가 있으며, 지나치지 않은 돌발상황이 전하는 웃음이 있을 뿐이다. 캐스팅과 해프닝, 디렉팅의 삼박자가 이렇게 척척 맞을 수가 없다. 느낌이 좋다. 뜰만 한 프로그램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기존 예능을 떨게 하는 저력이 느껴졌다. 예능의 지향점을 일러주는 <꽃보다 할배>의 첫 회는 참으로 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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