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헌트>의 주인공 루카스루카스의 눈빛은 여러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엣나인필름
영화를 생각하며 김수영의 시를 읽다가 한 구절이 마음에 와닿았다.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이 눈을 깜짝거린다세계는 그러한 무수한 間斷오오 사랑이 추방을 당하는 시간이 바로 이때이다내가 나의 밖으로 나가는 것처럼눈을 가늘게 뜨고 산이 있거든 불러보라나의 머리는 관악기처럼우주의 안개를 빨아올리다 만다김수영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밖으로 걸어나가 듯이 자기 바깥으로 걸어나가고 싶었다. 아니, 자기 바깥으로 걸어나가는 것이 세계의 밖으로 걸어나가는 것이었다. 김수영은 세계를 무수한 간단(間斷, 계속되던 것이 한동안 끊김)의 시간으로 인식했다. 세계는 눈깜짝임으로 단절될 수 있는 곳이다. 그 순간은 '나의 밖으로' 나가는 것 같다. 그런데 그의 몸은 그대로이고 눈만 깜짝인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시인처럼 나도 이 세계가 피곤하다. 단독자인 내가 다룰 수 없는 거대한 세계 속에서, 나는 인식으로라도 세계를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곤 한다. 눈을 깜짝이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나의 몸과 인식은 이렇게 단절된다. 나의 속한 곳과 속하고 싶지 않은 곳은 동일하고, 나의 속한 곳과 속하고 싶은 곳은 다르다. 그래서 끊임없이 고민한다.
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제도를 벗어나려는 몸부림들이 곳곳에 많다. 병역거부, 비혼, 반자본주의, 주민등록 거부 등. 하물며 스마트폰에서 피처폰으로 바꾸는 사람들도 점점 늘고 있다. 왜 이들은 최첨단 유행과 편리를 거부하는 것일까? 제도 속에서 나는 정말 행복한 것일까. 이 질문은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과 선택 역시 나에게 달려있다. '나는 행복하지 않아, 너도 행복하지 않을거야'라고 섣불리 비관할 수 없듯이 '나는 이 제도 속에서 행복해, 너도 행복할거야' 혹은 '네가 잘 하면 행복할 수 있어'라고 쉽게 긍정할 수도 없다.
나는 '나의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나는 '나'(제도에 물든 나)의 밖으로 나가 '나'(새로운 나 일 수도 있고 본래의 나 일 수도 있는 나)를 찾을 수 있을까. 나의 밖으로 나가는 것은, 나를 객관화 시켜 보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 대한 사랑을 걷어내는 것이고, 그래서 시인은 '사랑이 추방당하는 시간'이라고 노래했다.
루카스가 마을로 돌아온 이유를 고향에 대한 사랑, 친구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집단 폭력 속에서도 인내하며 친구들을 떠나지 않는 루카스의 태도가 감동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지금 이곳은 계속 머물러야 하는 곳인가'하는 물음에서 다시 생각해본다면, 내가 속한 세계에 대한 친밀감과 애정은 무리에 속하고 싶은 본성의 표현일 수 있는 것이다. 무리에 속하고 싶은 본성은 이 세계의 시스템과 너무나 잘 들어맞아 시스템의 그림자를 알면서도 눈감게 만든다.
제도의 불합리성에 대한 고민은 행복과 안전의 양자택일과 맞닿아 있다. 루카스는 폭력을 견디며 무리 속에 남는 것이 떠나는 것보다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시인 김소연이 결혼에 대해 쓴 한 산문에서 '제도 속에서는 행복한 삶이 우선되지 않는다. 안전한 삶을 우선 보장한다'고 말한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면 행복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을, 안전하게 보장받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고 나 역시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이 세계의 그림자가 불편하고 거부하고 싶지만, 눈을 깜빡이는 정도로만 세계를 거부한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다시 익숙한 세계가 펼쳐지고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곳으로 되돌아간다.
이 영화의 힘이 여기에 있다. 거짓이 진실을 압도하는 제도 속으로 돌아가는 나를 보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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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영화와 시, 소설을 좋아했다. 지금은 워킹맘으로 양육과 일 두마리 토끼를 잡느라 고군분투하고 있다.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