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상대적 진리와 죄의식의 무덤

영화 <처녀의 샘:Jungfrukallan> 속 침묵, 심판, 죄

11.12.04 11:38최종업데이트11.12.04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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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국은 광기와 비이성에 대한 논의를 요구한다. 사회의 위기는 자신의 믿음으로 타인을 재단하고 나아가서는 심판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온다. 이 위기를 키우는 것은 그들 자신이 직접 내린 심판의 공과 과를 절대자, 혹은 추종의 대상에게 떠넘기는 편리함이다.

2007년 타계한 스웨덴의 거장감독, 잉마르 베리만의 <처녀의 샘>(1960)은 중세 스웨덴의 보수적이고 신앙심 깊은 가족에게 일어난 비극을 소재로 한다. 영화에는 피를 보이는 대신 살인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시간을 건너뛰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는, 두 번의 잔혹한 범죄 장면이 등장한다. 양치기들이 지주의 딸을 살해하는 최초의 죄와 이에 대한 복수로 지주가 양치기들을 살해하는 두 번째 죄다.

눈에 띄는 것은 영화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다루는 방식이다. 치밀하게 계획한 것도 대단한 동기가 있었던 것도 아닌 강간과 살해. 그렇게 극적인 힘이 빠진 고통의 순간에는 신음 소리를 빼면 아무 것도 없다. 희생자는 아무 배경음악도, 울부짖음도 없는 적막 속에서 혼자 신음한다. 죄를 범한 자도 그 긴 시간 동안 광기 때문에, 혹은 당황해 침묵을 지킨다. 딸을 잃은 희생자이자 딸을 살해한 이들을 직접 잔인한 방식으로 처단한 지주 토레와 그 아내 역시 영화 속에서 자주 말을 잃는다. 흑백의 화면에는 일종의 죄의식이 가득 퍼져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두 번의 살해보다 충격적인 건 결말이다. 숲에 버려져 죽어가던 딸을 구원해 주지 않은 신을 원망하면서, 동시에 신에게 강간범들을 죽인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아버지. 자신의 신에게 긴 고백을 읊던 그는 그 원망과 속죄의 마음을 모아 딸이 죽은 자리 위에 더 큰 교회를 지을 것을 약속한다. 이 기도는 두 문장으로 요약된다. '신이시여, 용서하소서!' '내 죄 위에 성전을 지을 것입니다.'

토니 모리슨의 소설 <가장 푸른 눈>에는 '구원자로서의 예수와 심판자로서의 예수'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처녀의 샘>은 영화 내내 등장인물들이 신에게 구원, 또 그 외의 많은 것들을 구하지만 정작 강조하는 것은 후자인 영화다. 신은 심판의 기준을 알려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심판의 주체다. 토레가 자신의 벗은 몸에 가한 회초리질은 신이 자신에게 내릴 체벌을 대신 맡아한 것일 뿐이다. 낯선 과객들에게는 쉴 곳과 저녁식사를 내줬던 그가 복수를 실행할 땐 공모자라는 이유로 어린 아이에게서마저 자비를 거둔 것 역시 그 순간의 신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토레는 자신이 절대적이라고 믿고 있는 진리와 형벌의 기준이 실은 그 스스로 정립하고 실행하고 있는 것임을 전혀 의심하지 못한다.

그렇게 감사는 더하고 죄의식은 던다. 종교가 아니라도 절대적인 믿음이 주는 마음의 평화란 그런 것이다. 자신의 맹신에 사회구성원 전체를 끼워 넣으려는 이들 덕에 가장 안전해보였던 '상식'은 이제는 가장 쓰기 조심스러운 단어가 됐다. 더 많은 토레들이, 상대적 진리와 죄의식을 그들의 교회터에 함께 묻는다. 그렇게 사회는 진짜 평화와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덧붙이는 말: 잉마르 베리만의 <처녀의 샘>은 영화관에서도 볼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이화여대 ECC에 자리잡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내년 5월 31일까지 '잉마르 베리만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디지털 복원 HD판으로 상영한다 하나 장기 프로그램인 만큼 구체적 계획은 미리 문의하는 것이 좋다. http://www.cineart.co.kr/

첨부파일 90708-050-FC34C104.jpg
잉마르 베리만 잉그마르 베리히만 처녀의 샘 아트하우스 모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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