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우그는 21번을 달았던 또하나의 전설 박철순과 함께 한국야구사에 '극기'의 상징으로 이름을 남겼다.
한화 이글스
결국 경기는 한화의 10대 1 대승으로 끝났고, 광주 무등경기장에서는 홈팀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100발의 축포가 쏘아 올려졌다. 바로 그 날 원정팀 한화 이글스의 선발투수 송진우가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개인통산 200승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 해 7월 30일 잠실 두산전에서 통산 199승을 넘어선 이후 꼭 한 달간 5번째 도전 끝에 보탠 귀중한 1승이었고, 그의 나이 만 40세 6개월 13일의 일이었다.
200승, 자신을 이겨내고 얻은 전리품
선발 5인 로테이션 체제가 일반적인 오늘날 보통 한 명의 선발투수가 한 시즌 내내 로테이션을 지킨다고 할 때 부여받게 되는 등판 기회가 25회 안팎이 된다. 그래서 선발투수에게 승패의 책임이 지워지지 않는 몇 경기를 제외하면, 대략 5할 이상의 승률이면 달성할 수 있는 것이 10승이다.
하지만 투수는 상대 타자하고만 승부하는 것이 아니다.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부상의 위험과도 싸워야 하고, 자신의 체력 한계와도 싸워야 하며, 팀 내 경쟁자들과도 '출전기회'를 놓고 싸워야 한다. 그래서 한 시즌을 치르고 나면 각 팀에서 시즌 내내 로테이션을 거르지 않고 개근하는 선발투수의 숫자가 2, 3명도 남지 않게 된다.
따라서 10승이란, 팀 내 경쟁에서 살아남은 뒤 한 시즌을 부상 없이 버텨낼 수 있는, 철저하고 성실한 몸관리에 성공한 투수가 주어진 기회에서 최소한 절반 이상을 5회 이상 버텨내며 최소한의 실점으로 팀의 승리를 지켜내야 얻을 수 있는 훈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흔히 A급 선발투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시즌 10승이며, 한 시즌 20승을 기록한 투수에 대해서는 '슈퍼에이스'라는 호들갑스런 칭호를 붙여도 아깝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대단한 10승을 20년 동안 쉼 없이 이어갈 때 도달할 수 있는 200승이란, 누구라도 쉽게 목표로 삼거나 현실적인 가능성의 영역 안에서 논할 수 없는 경지가 된다. 송진우의 기록은 바로 그 가능과 불가능, 현실과 초현실의 애매한 영역에 분명한 객관적 증거를 가진 목표선을 그은 것이고, 그로써 현존하거나 앞으로 등장하게 될 모든 투수들에게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는 분명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불모지에 태어나 개척자가 되다
송진우는 야구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충북 증평에서 태어나 청주 세광고 2학년 시절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모교의, 그리고 동시에 충북야구의 첫 전국대회 우승을 이끈 선구자였다. 약체 팀의 에이스가 짊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대로 그 역시 어린 나이부터 무리한 탓에 동국대 2학년 시절에 팔꿈치 수술을 받아야 했고,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는 바람에 프로 진출도 동기들보다 1년 늦추어지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프로무대에 오르자 그는 늦은 세월을 벌충이라도 하겠다는 듯 달렸다. 첫 발을 프로통산 다섯 번째로 기록되는 '신인 데뷔전 완봉승'으로 장식하며 나타난 그는 특히 선발과 마무리를 '오간' 것이 아니라 동시에 '병행'했다. 그래서 루키 시즌이던 1989년에 9승과 9세이브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선발투수로 전념하게 된 1995년 이전까지 6년 동안 방위병으로 복무하며 홈경기에만 나섰던 '반쪽짜리' 시즌 두 개를 포함하면서도 무려 66승과 82세이브를 쌓아올린 성적은 완벽한 '2인분'의 활약이었다.
그 기간 중 1991년에는 11완투-11세이브를 기록하고 1992년에는 19승과 17세이브(25세이브포인트)로 다승과 구원 타이틀을 동시에 석권하는 엽기적인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그런 초인적인, 하지만 비정상적인 활약 덕분에 신생팀 빙그레는 해마다 한국시리즈의 단골손님이 되는 리그 최강팀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선발투수로 전업한 뒤에도 1995년과 1996년 각각 13승과 15승을 올렸던 그는 입단 9년 만인 97년 9월 20일 인천 현대전에서 선발승을 거두며 역대 10번째로 100승을 돌파했다. 하지만 그 1997년과 1998년에는 선수인생에서 처음으로 평균자책점이 4점대로 치솟는 동시에 승수도 6까지 떨어지는 깊은 슬럼프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미 30대 중반으로 향하던 그에게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무리와 과로가 독을 뿜기 시작한 것이었고, 이제 슬슬 선수인생의 종막이 시작되리라는 것이 대부분 전문가들의 전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