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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작가' 폴란스키의 초기작 '혐오'

밀폐된 공포

10.06.20 12:08최종업데이트10.06.20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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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Repulsion)
1965년 영국영화
감독, 각본 : 로만 폴란스키
출연 : 카트린느 느뇌브, 이안 헨드리, 존 프레이저, 이본느 퍼노

영화 '피아니스트'(2002)로 우리에게 익숙한 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최근작 '유령작가'의 개봉과 더불어 그간 그가 만든 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 중 '혐오(Repulsion)'는 '악마의 씨', '세입자'와 더불어서 이른바 '아파트 3부작'이라 불리며 아파트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현대인의 불안 심리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 '혐오'는 우리 시대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인 로만 폴란스키가 감독 생활 초기에 22살의 프랑스 여배우 카트린느 느뇌브(영화 '쉘부르의 우산')를 주연으로 찍은 심리극으로서 폐쇄 공간인 아파트에서 사는 한 아가씨가 며칠간에 겪는 일을 다루고 있다.

▲ 영화 '혐오'에서 카트닌느 드뇌브 . ⓒ 영화'혐오'


마사지 숍에서 네일 관리사로 일하는 캐롤은 언니와 둘이서 낡고 좁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녀의 언니는 남자와 자유롭게 연애를 하며 살아가지만 캐롤은 지독한 결벽증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언니의 남자친구는 동생을 병원에 보내야 하지 않냐고 넌지시 권유하지만 언니는 덮어버리기에 급급하다.

무미건조하게 혼자만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캐롤은 언니의 남자친구가 오는 밤이면 건너 방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참을 수가 없다. 그리고 자신을 쫓아다니는 남자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에 남자는 애가 달아 있는 참이고, 그러던 중 남자는 급작스런 키스를 시도해 보지만 캐롤은 그 불쾌함을 씻어내기 위해서 열심히 양치질을 하기 바쁘다.

그러던 중 언니와 남자 친구는 며칠 간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고 캐롤은 혼자서 텅 빈 아파트에서 혼자 지내게 된다. 극도로 불안해진 그녀는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발자국 소리가 복도를 맴도는 기분에 불안해지고 장롱으로 막아놓은 문을 열고 낯선 남자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서 덮치는 환영에 시달린다. 벽은 비스킷 조각처럼 쩍쩍 갈라지고 찰흙처럼 이지러지며, 그 벽에선 수많은 손이 튀어나와서 그녀를 휘감는 환영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언니가 요리하려다 그냥 둔 토끼 고기는 그대로 썩어가고 부엌 창가에는 감자에서 싹이 점점 길게 자라서 뭉그러지고 있다. 지독한 결벽증인 그녀는 집에 오면 손발부터 씻었지만 이제는 집안 청소도 하지 않고 난장판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마사지 숍에서도 손님의 손에 상처를 내서 피를 쏟는 실수를 하고, 그녀의 핸드백에는 썩은 토끼 머리가 들어 있다.

이제 그녀는 집에만 틀어박혀 불안에 떤다. 잠을 자려고 침대의 이불을 들추면 낯선 남자가 런닝셔츠 바람으로 누워 있다가 그녀를 덮친다. 벽은 점점 더 심하게 갈라지고 더 많은 손이 튀어나와서 그녀를 휘감는다. 자아를 잃어버린 캐롤은 울음이 담긴 목소리로 미친 듯이 노래를 웅얼거리며 바느질로 하루를 보낸다.

어느 날 그녀를 짝사랑하는 남자가 아파트로 찾아온다. 그녀는 곁에 있던 촛대를 들고 그의 행동을 살핀다. 그리고는 이유 없이 공포감이 엄습하여 그를 촛대로 내리쳐서 죽이고 시체를 욕조에 담근다.

어느 순간이 지나자 이젠 그녀도 무서운 상황에 적응이 되어버린다. 벽에서 손이 튀어나오는 환영에도 놀라지 않고 덤덤히 그 손들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즐겁게 콧노래를 부르며 다림질을 한다. 그건 남자의 런닝셔츠다. 다릴 필요도 없는 속옷, 게다가 극도로 혐오하는 남자용 물건이다. 그런데다 다리미의 코드는 꽂혀 있지도 않다. 하지만 그녀는 열심히 다림질에 몰두한다.

난장판이 된 집에선 파리 소리와 시계초침 소리만 가득하다. 가끔씩 전화벨만이 정적을 깬다. 하지만 잘못 걸려오는 전화에 예민해진 그녀는 전화선을 잘라버린다. 이탈리아에서 언니가 보낸 엽서를 우체부가 문틈으로 넣어주고 갈 뿐 어느 누구도 아파트에 오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전화 연락이 되지 않자 집 주인이 월세를 독촉하러 집으로 찾아온다. 주인은 돈을 받고 나서 젊은 아가씨가 홀로 아파트 안에 있다는 사실에 성욕이 발동하여 그녀를 부추긴다. 캐롤은 본능적으로 방 안에 떨어져 있던 칼을 주워든다. 그리고 주인이 덮치려는 순간 남자를 살해한다.

비가 많이 쏟아지는 어느 밤, 언니와 남자 친구는 여행에서 돌아와 아파트에 들어선다. 그리고 난장판이 된 아파트 안에서 시체를 발견하고, 침대 바닥에서 누운 채로 죽어 있는 동생을 발견한다.

캐롤이 왜 그토록 남성 혐오증에 시달리는지, 우울과 결벽증에 시달리는지를 영화는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어눌하고 힘이 없어 보이는 한 아가씨가 자신의 내면적 공포를 어떻게 대하고 그에 항거하는지를 보여주며 마지막에 그녀의 어린 시절의 가족사진을 클로즈업하며, 그녀가 어떤 삶의 과정을 거쳐 왔는지는 관객에게 답을 맡긴다.

시계초침소리로 불안과 공포의 감정을 표현한 이 영화는 소리의 절제가 돋보이며, 아파트라는 일상적인 공간을 환각의 지옥으로 묘사한 표현주의적 면모가 돋보인다. 또한 좁은 공간에서의 촬영은 개인의 강박관념을 더욱 극대화하며 로만 폴란스키의 작품 중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

로만 폴란스키 혐오 유령작가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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