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공격형 미드필더 조원희를 위한 변명

[2009-2010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5-0 위건 애슬레틱

09.12.31 10:59최종업데이트09.12.31 11:39
원고료로 응원
축구장, 이른바 강팀이라 불리는 팀에서 뛴다는 것은 선수로서 행운이기도 하면서 볼 키핑력, 패스의 정확도, 몸싸움 과정에서의 균형 유지, 부분 전술을 바탕에 둔 공간 점유 등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기력들을 몸 속 깊이 느낄 수 있는 기회다.

그런데, 세계적인 축구 클럽 맨유에서 뛰고 있는 측면 미드필더 박지성은 그럴 수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프리미어리그 강등권에 내려가 있는 위건의 가운데 미드필더 조원희는 그렇지 못했다. 5-0이라는 경기 결과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이끌고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는 우리 시각으로 31일 새벽 잉글랜드 맨체스터에 있는 올드 트래포드에서 벌어진 2009-2010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위건 애슬레틱과의 안방 경기에서 5-0의 대승을 거두고 기분 좋게 2010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순도 100%의 맞대결

 위건 MF 조원희

위건 MF 조원희 ⓒ 위건 애슬레틱

현재 한국 축구의 미드필더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박지성과 조원희. 그들은 2009년이 저물기 전에 작은 꿈을 이뤘다. 어쩌면 멀리 고국에서 응원하고 있는 수많은 축구팬들의 꿈을 대신 이루었다고 할 수 있었다.

현지 시각으로 12월 30일 밤 8시에 킥 오프 휘슬이 울린 2009년의 마지막 경기,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7만 5천명에 가까운 대관중이 몰려든 꿈의 극장 '올드 트래포드'에 한국 축구팬들로서는 잊을 수 없는 축구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를 거쳐 간 한국 출신 선수들이 적지 않았지만 이렇게 선수 교체 과정 없이 시작부터 나와서 끝까지 뛰는 순도 100%의 제대로 된 맞대결은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2006년 4월 17일 런던에 있는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있었던 우정의 맞대결(토트넘 DF 이영표-맨유 MF 박지성)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박지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뛸 기회가 적었던 조원희에게는 이 순간이 더욱 특별하게 기다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 선수들은 지나칠 정도로 강한 실력자들이었다. 그러니 조원희의 표정 속에서 잠시라도 여유를 찾기는 어려웠다. 특히, 맨유 선수들은 거기가 아무리 자기네 안마당이라고 하지만 전반전 3골, 후반전 2골을 몰아넣으며 점수판을 5-0으로 만들어 버렸기에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득점 기록도 일부 유명 선수에게만 몰린 것이 아니라 공격수(루니, 베르바토프 각각 1골)부터 시작하여 측면 미드필더(발렌시아 1골), 가운데 미드필더(캐릭 1골), 측면 수비수(하파엘 1골)에 이르기까지 전 포지션을 망라해서 나왔다. 한 마디로 모든 면에서 일방적인 경기가 펼쳐진 것이었다.

박지성은 지난 28일 헐 시티와의 방문 경기 62분에 교체 선수로 나와 약 30분간 활약한 것에 이어서 이번에는 아예 왼쪽 미드필더로 모든 시간을 다 소화할 정도로 특유의 왕성한 몸놀림을 자랑했다. 아쉽게도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47분에 동료 골잡이 웨인 루니에게 수준 높은 찔러주기를 보내서 위력적인 왼발 돌려차기를 시도하게 하는 등 날카로운 패스의 줄기와 매끄러운 공간 움직임을 자랑했다.

조원희, 마르티네스 감독을 원망해야 하나?

반면에 방문 팀 위건의 공격형(가운데) 미드필더로 나온 조원희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시간들이었다. 38분에 동료 골잡이 로다예가에게 넘겨준 공이나 61분에 은조그비아에게 밀어준 결정적인 찔러주기가 골로 이어지지 못해 적잖은 아쉬움을 남겼고, 0-5라는 참패 결과 자체가 그의 침울한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드리블이나 몸싸움을 통해 공간을 찾아나가는 것보다는 짧고 정확한 패스를 선택하면서 상대의 강한 조직력을 흔들어놓으려고 시도했지만 전체적인 공격 속도에서 큰 차이를 드러내면서 위건 선수들은 그 한계를 느껴야 했다. 더구나 오래간만에 실제 경기에서 동료들과 호흡을 맞추는 것이었기 때문에 플레이 메이커 성격의 미드필더로 뛴 조원희로서는 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다.

조원희의 입장에서 마음 한 구석으로는 에스파냐 출신의 젊은살 감독 로베르토 마르티네스(36)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을 지도 모른다. 자주 경기에 못 나오는 것은 그렇다 쳐도 지난 9월 이후 두 번째 나온 경기마저 이렇게 참담한 결과를 맛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달 22일 런던에서 열린 토트넘 홋스퍼와의 방문 경기 85분에 바꿔 들어온 조원희는 1-9라는 보기 드문 참패를 실감하는 순간에도 그라운드에 있었고 이번에도 맨유에게 0-5의 쓰라린 뒷맛을 느끼며 올드 트래포드를 걸어나가야 했다. 아마도 그는 꿈의 극장에서 절대로 이러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가 최근에 뛴 두 경기가 모두 방문 경기였고 상대가 이번 시즌 최고 수준의 경기력을 자랑하고 있는 팀이었기 때문에 그런 결과(2경기 1득점 14실점)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새로운 포지션에 적응하고 실력을 키워가야 하는 조원희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2009년 겨울인 셈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조원희에게 이러한 시련의 시간들이 매우 소중한 밑거름이 될 것으로 보인다. 12월 일정 중 단 한 경기도 이기지 못한(2무 3패) 위건이 비록 지금은 2부리그 강등 위기(5승 4무 10패, 16위)에 놓여있지만 마르티네스 감독이 추구하는 아기자기한 미드필드 패스 플레이를 충분히 익힐 수 있다면 조원희 개인으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는 일이 아닐까?

측면 미드필더나 수비수, 가운데 수비형 미드필더로서의 멀티 플레이어 기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조원희에게 조금 아쉬웠던 부분이 패스의 날카로움과 슛의 정확성이었기 때문에 현재 마르티네스 감독이 그에게 주문하고 있는 플레이 메이커로서의 역할이 그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강등권에서 벗어나기 위한 중요한 일정 중에서 더구나 맨유처럼 강팀을 상대해야 하는 경기에서 그에게 공격형 미드필더로서의 임무를 부여했다는 것은 0-5라는 결과를 떠나서 매우 의미 있는 조처였다. 동료들과 마음과 발이 모두 맞지 않아 답답한 경기를 펼치기는 했지만 훗날 그가 또 다른 경기 장면들을 만들어낼 때 이 경험들 하나하나는 본인만이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자양분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2009-2010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경기 결과, 31일 올드 트래포드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5-0 위건 애슬레틱 [득점 : 루니(28분), 캐릭(32분), 하파엘(45분), 베르바토프(50분), 발렌시아(75분)]

◎ 맨유 선수들
FW : 베르바토프(68분↔웰벡), 루니
MF : 박지성, 캐릭, 플레처, 발렌시아
DF : 에브라(69분↔파비우), 브라운, 비디치(68분↔안데르손), 하파엘
GK : 쿠슈차크

◎ 위건 선수들
FW : 로다예가
MF : 샤르너, 은조그비아(68분↔싱클레어), 조원희, 고메스, 토마스(71분↔에드만)
DF : 휘게로아, 브램블, 보이스, 멜키오트
GK : 커클랜드(46분↔폴리트)
박지성 조원희 축구 맨유 위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천 대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축구 이야기,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