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차 선발투수, 이대진앞으로도 별다른 대박을 꿈꿔볼 수 없는 서른 다섯 살짜리 이 투수가, 오로지 '야구하는 즐거움' 때문에 누구보다도 많은 훈련량을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소화해내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 감동적이다
기아 타이거즈
안타는커녕 단 한 개의 사사구도 허용하지 않고 9회말 2아웃까지 압도해가다가도 야수의 실책 하나 때문에 퍼펙트게임을 놓치고 허탈감에 빠지는 순간, 곧바로 연타 당하며 패전의 위기로 내몰리는 것이 투수다. 아무리 완벽한 구위를 가졌다 하더라도 심리적으로 삐끗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예민한 존재가 바로 투수인 것이다.
그러나 이대진은 달랐다. 바로 그 순간부터 그의 야구는 다시 시작되었고, 멋진 초반 기습에 성공하며 돌파구를 열었다고 생각했던 삼성의 타자들은 더 이상 이대진의 공에 손을 대지 못했다.
이대진은 9회 초에 양준혁이 다시 한 개의 안타를 때려내기까지 단 한 개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았고, 무려 11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이승엽 역시, 두 번 입술 깨문 노련한 고수에게 더 이상의 흠집을 낼 수는 없었다. 3타수 1홈런, 2삼진.
경기 결과는 3-2, 이대진의 2피안타 완투패였다. 1회 말 곧바로 이종범의 안타에 이은 도루, 그리고 이건열과 박재용이 희생플라이와 적시타를 때려내며 곧바로 2점을 따라갔지만, 삼성의 김상엽 역시 4안타 7탈삼진으로 내달리며 끝내 혼자 경기를 마무리해냈던 것이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한 차례씩 다운을 주고받고도 곧바로 일어서 꼿꼿하게 12라운드를 완주해내는, 독한 근성과 완벽한 기량을 가진 에이스들이 펼친 사상 최고의 투수전이었다.
김상엽은 그런 투수였고, 또 이대진은 그런 투수였다. 경기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누구도 막아낼 수 없는 날카로운 창이었을 뿐만 아니라, 등 뒤가 무너질 때도 당황하지 않는 단단한 방패였다. 그리고 허깨비 같은 번민과 불운 앞에서 흔들리거나 무릎 꿇는 나약함을 알지 못하는 강한 사람들이었다.
에이스를 동원해도 이길 수 없는 팀, '해태 타이거즈'이대진이 재학했던 1990년부터 1992년 사이, 광주 진흥고는 전국무대에서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다(봉황대기에서 32강과 16강에 한 번씩 올랐을 뿐이었다). 따라서 이대진이라는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질 기회가 없었지만, 그는 그 3년 동안 무려 21개의 홈런, 그 중에서도 장외홈런만 무려 14개를 때려냈을 만큼 걸출한 타자였다. 최소한 그의 경기를 지켜보아온 광주 지역의 야구인들은 그를 동갑내기 중에서도 부산고 진갑용의 수준을 넘어 신일고 강혁과 나란히 놓을 만하다고 평가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교 졸업 후 입단한 해태 타이거즈는 그에게 투수에 전념할 것을 요구했다. 비록 이듬해 126.1이닝을 던지며 0.78의 평균자책점으로 부활하기는 하지만 1992년에 선동열이 원인도 확실하지 않은 어깨 통증에 시달리며 32.2이닝밖에 던지지 못해 결국 포스트시즌에서 롯데 자이언츠에게 밀리자, 김응룡 감독은 마운드의 높이를 다시 한 번 다질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데뷔 첫 해인 1993년, 이대진은 17승의 다승왕 조계현과 11승의 마당쇠 송유석에 이어 김정수, 이강철, 마무리 선동열과 더불어 10승을 올리며 확실한 '차세대 에이스'로 기대에 부응했다.
그리고 1994년에는 방위 복무를 겸하며 7승, 시즌 중에 방위 복무를 마친 1995년에는 곧장 탈삼진왕에 오르며 14승으로 팀 내 최다승 투수가 됐고, 1996년에도 16승으로 에이스의 입지를 다졌다. 그리고 1997년에는 중간계투로만 20승을 올린 김현욱에 이어 선발투수 중 가장 많은 17승을 기록하며 투수부문 골든글러브를 차지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강한 상대와 맞섰을 때 더욱 강해지는 모습으로 팬들에게 묘한 쾌감을 선사하는 선수였다. 사실 '에이스'라 불릴 만한 투수가 한둘이 아니었던 팀 타이거즈의 젊은 투수였던 탓에 종종 상대팀 에이스와 맞붙어야 하는 순번의 로테이션을 돌면서도 그는 대개 승리를 엮어냈고, 결국 다른 팀의 입장에서 해태 타이거즈는 '에이스를 동원해도 이길 수 없는 팀'이 되어버렸다. 말하자면 그는, '무적 해태 타이거즈’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주역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선동열의 막강한 존재감 때문에 두 번이나 다승왕에 올랐던 조계현에게 마저 '해태 타이거즈의 에이스'라는 칭호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던 그 시절, 이대진에게 붙여진 별명은 그냥 에이스도 아닌 '에이스 오브 에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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