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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극장의 주임변사, 흥행극의 작가가 되다

[한국영화스타 12] <검사와 여선생>의 작가 김춘광(김조성)

07.07.28 10:35최종업데이트07.07.2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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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초반, 변사들의 사진이 들어간 조선극장의 홍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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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영화시대'의 꽃은 스크린의 배우가 아닌 스크린 밖의 '변사'였다. 대부분이 문맹이었으며 영화라는 매체에 익숙하지 않던 시절, 변사는 관객들에게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를 안내하는 안내자였다. 관객은 변사의 설명을 통해 영화의 내용을 이해했고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그래서 영화의 수준보다는 변사의 수준이 더욱 중요했고 어느 배우가 나오는지보다 어느 변사가 나오는지에 따라 흥행의 성패가 좌우되었다. 당시 극장 선전 광고지에는 소속 변사들의 사진을 넣어 광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금의 스타들이 누리는 관심과 부는 당시에는 일류 변사들의 차지였다.

<한국영화측면비사>를 쓴 안종화에 의하면 전문 변사의 시조는 '우정식(禹正植)'이었다고 한다. 광무대를 드나들며 활동사진에 빠져있던 그를 광무대 운영자인 박승필이 변사로 데뷔시킨 것이다.

그러나 우정식은 변사로서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변사가 별로 없었던 시절에는 그런대로 그의 설명이 먹혀들어갔으나 관객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그의 느긋한 설명에 관객들은 야유를 보냈다. 희극영화와 같이 빠른 템포의 영화의 경우 그의 설명이 영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극장에는 여러 명의 변사가 있어서 이들이 돌아가면서 해설을 맡았다. 이중 무성영화시대 변사로 이름을 날렸던 인물로는 김덕경, 김영환, 김조성, 서상호, 서상필 등이 있었다. 당시 이들 변사들은 극장의 현금제조기로 통했으며 조선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단성사, 조선극장, 우미관에서는 이들을 서로 모셔가기 위해 최고 대우를 했음은 물론이다. 당시 그들이 받는 월급은 고위관리 월급의 두 배가 넘었으며 월급 외에 지방공연 시에는 따로 수당을 받았다.

조선에서도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자 이들 변사들은 영화제작에 관여했다. 1923년 동아문화협회에서 제작한 <춘향전>은 변사로 이름을 떨친 김조성이 이몽룡 역할을 맡았고, 변학도 역은 변사 최영환이 맡았다. 다음해 단성사에서 제작한 <장화홍련전>은 유명 변사인 김영환이 각본을 썼으며, 장쇠 역과 사또 역은 역시 유명 변사인 최병룡과 우정식이 맡았다. 무성영화시기 유명 변사들은 당대의 스타로서 영화해설뿐만 아니라 영화제작에도 큰 역할을 한 것이다.

토오키가 등장하고 무성영화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변사라는 직업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부와 인기를 한 손에 쥐었던 유명 변사들은 인기가 한창이던 시절 주색과 마약에 빠져 가산을 탕진했고 토오키라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초기 유명 변사 중 극작가로 변신하여 극단을 운영하며 해방 후까지 활동했던 김조성(김춘광)을 비롯한 일부만이 변신에 성공했을 뿐이다.

조선극장과 변사 김조성

 김조성, 1938년 이후 김춘광이라는 이름을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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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성은 1900년 9월 16일 황해도 평산에서 독립운동가 출신 김동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독립운동을 위해 간도 등지를 떠돌았기에 김조성 역시 모친의 손에 이끌려 각지를 떠돌아야 했다. 소학교는 평양에서, 중등교육은 서울의 보성고보에서 받았고 일본을 오가며 견문을 넓혔다고 한다.

김조성이 언제 변사가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와 함께 변사활동을 했던 성동호는 김조성이 본래 취성좌의 배우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김조성은 김소랑이 이끌던 취성좌에서 배우로 활동하던 중 변사로 변신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김조성이 연예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시기는 흥행계의 실력자로 통하던 하야가와(早川孤舟)의 눈에 띄어 그와 함께 동아문화협회를 조직하고 <춘향전>을 만들게 되면서부터이다. 당시 <매일신보>의 기사에는 김조성이 신진배우에서 일약 간부의 반열로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고전을 영화화하는 데 있어 조선인 조력자가 필요했음은 충분히 추측 가능하다.

김조성이 중역으로 있던 동아문화협회에서는 3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대부분 이해조의 신소설을 각색한 작품이었다. 하야가와가 연출을 맡은 <춘향전>은 박기홍의 춘향가를 토대로 쓰인 이해조의 <옥중화>를 각색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서 김조성은 이몽룡 역을 맡아 연기했다. 성춘향 역은 송상 출신으로 당대의 거부인 박우현이 추천한 기생 한명옥(한룡)이 맡았으며, 월매, 향단 역을 비롯하여 수십 명의 배역은 일본인 전북지사가 알선한 남원 주민 중에서 선발되었다.

이구영의 말을 빌린다면 초기 영화가 다 그렇듯, <춘향전> 역시 영화라기보다는 슬라이드에 가까웠으며 관객은 김조성의 해설을 통해 <옥중화> 한 권을 그림과 함께 듣는 것에 불과했다고 한다.

<춘향전>은 1923년, 군산의 군산좌와 서울의 황금좌에서 상영되었다. 하야가와가 운영하던 서울의 황금좌는 일본인들이 주로 출입하는 극장임으로 조선인 전속 변사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 <춘향전>에서 이몽룡 역을 맡은 김조성이 변사로 나서 해설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24년 9월 5일, <춘향전>은 조선인 극장인 조선극장에서 상영된다. 분란에 휩싸인 조선극장의 운영권을 동아문화협회에서 획득한 것이 1924년 7월이었다. 1924년 9월, 단성사에서 제작한 <장화홍련전>이 개봉되자 조선극장에서는 맞불작전으로 소유주인 동아문화협회에서 제작한 <춘향전>을 재개봉한 것이다. 김조성이 해설했음은 물론이다.

원래 조선극장은 대동권번의 이사로 있던 황원균에 의해 1922년 세워졌다. 평양기생들이 중심이 된 대동권번은 3·1운동의 영향으로 민족의식이 높아가던 화류계에 친일파를 양성하기 위해 지바(千葉了) 경찰부장의 주도로 화류계의 친일인사들에 의해 1920년 8월 14일 주식회사 형태로 조직된 권번이었다.

황원균은 1919년 11월,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탈출하려는 의친왕의 계획을 미리 알고 일본관헌에 신고하여 그 시도를 무마시킨 장본인이었다. 그 일로 지바경찰부장의 신임을 얻은 황원균은 친일권번인 대동권번의 창설에 관여했으며, 조선인 최초로 극장건설과 운영권 모두를 획득할 수 있었다. 더욱이 동양생명보험을 통해 극장 건설 자금까지 융통 받을 수 있었다.

인사동 입구에 지어진 조선극장은 지상 3층 건물로 가족석에 엘리베이터까지 달린 최신 시설의 극장으로 1922년 11월 6일 개장했다. 개관공연으로 만파회의 <장발장>이 윤백남 연출로 공연되었으며, 각 권번 기생들의 공연과 영화상영도 함께 거행됐다. 화려하게 출발한 조선극장은 황원균의 경영능력 부족으로 적자가 쌓이면서 운영이 어려워졌다.

그러자 자금을 빌려준 동양생명보험과 소유주 황원균 사이에 불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이는 조선극장이 1937년 화재로 전소되기까지 지속된 운영권을 둘러싼 내분의 시작이었다. 채권자인 동양생명보험은 조선극장의 소유권을 건축회사인 동양건물에 넘겨버렸다. 동양건물은 황원균이 가졌던 운영권을 희락관과 황금관을 운영하는 하야가와에게 넘긴다. 이 무렵 황원균이 이사로 있던 대동권번 또한 부채가 늘어 폐업하고 만다.

하야가와의 동아문화협회가 인수한 조선극장은 1924년 7월 13일, 내부공사를 마치고 상설 영화관으로 재탄생하였고 동아문화협회의 간부인 김조성은 조선극장의 주임변사가 된 것이다.

조선인 3대극장(단성사, 우미관, 조선극장) 중 하나인 조선극장의 주임변사가 된 김조성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다. 1925년 1월 1일 <매일신보>에 홍원생이 쓴 '해설계의 3성'이라는 기사에서 김조성의 해설에 대해 "남구(南歐)에서 봄 제금을 뜯는 듯한 음성, 경쾌하고도 애달픈 봄날의 피리소리를 듣는 듯한 어조, 쫄쫄 흘러가는 곡간(谷間)의 샘물같이 가벼웁게 리듬 있게 흘러가다가 돌부리에 막힌 듯 잠깐 멈추었다가 물이 넘게 되면 또다시 흘러가는 듯"하다고 극찬했다.

조선극장을 인수한 동아문화협회에서는 조선인 관객을 위한 영화 제작을 지속한다. <춘향전>에 이은 두 번째 작품은 당시 세상을 뒤흔들었던 기생 강명화의 자살을 극화한 <비련의 곡>이었다. 1924년 11월 28일 개봉한 <비련의 곡>은 영남 거부 장길상(장택상의 큰형)의 큰아들 장병천과 평양기생 강명화와의 비극적인 사랑을 영화로 만든 것이었다.

이 둘은 신분의 차를 넘지 못하고 1923년 6월, 강명화가 온양온천에서 '나는 결코 당신을 떠나 살 수 없는데 당신은 나와 살면 가족도 세상도 모두 외면합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더욱이 이 사건은 넉 달 후 장병천마저 자살하면서 백만장자의 아들과 기생의 정사(情死)라는 자극적인 내용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해조는 이 사건을 토대로 <강명화 실기>라는 신소설을 썼으며 동아문화협회는 <비련의 곡>으로 영화화했다.

<비련의 곡>에서 김조성은 주인공 장병천 역을 맡았고, 김조성의 조카이기도 한 기생 문용자가 강명화 역을 맡았다. 장병천의 친구 역으로 문예봉의 아버지 문수일이 연기했다. 연출은 <춘향전>과 마찬가지로 하야가와가 맡았다.

이구영은 이 영화가 <춘향전>보다는 잘 만들어졌지만 "천박한 퇴폐기분을 고조하려는 스토리"라며 혹평했다. <매일신보>와 <조선일보>에 실린 독자들의 관람평도 "더러운 사진", "걸레 같은 작품"으로 혹평이긴 마찬가지였다.

동아문화협회의 3회 작품은 이해조의 <연의 각>을 각색한 <흥부놀부>이었다. 이 작품에서 김조성은 더욱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데 배우로서 놀부 역을 연기했으며 하야가와를 대신해 연출까지 맡은 것이다. 흥부 역은 문수일이였다. <흥부놀부>는 1925년 5월 15일부터 7일간 조선극장에서 공개되었다.

1926년 8월 말, 조선극장은 경영난으로 문을 닫는다. 희락관과 황금관, 조선극장을 운영하며 조선의 극장계를 주름잡았던 하야가와는 재산을 정리하여 일본으로 떠나려고 후임을 물색했다. 동아문화협회도 해산하였다. 동아문화협회의 간부이기도 했던 조선극장 주임변사 김조성이 하야가와의 뒤를 이어 극장을 인계받았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극장 운영권은 차상호에게 넘어간다. 차상호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인 이갑성의 인척이었다. 차상호가 조선극장의 운영권을 인수하는데 촬영기사인 이필우가 큰 역할을 했다. 1926년 12월 9일, 조선극장은 전 관주 김조성과 전무 이필우의 갈등으로 폐관하고 만다. 김조성과 이필우의 감정싸움은 이필우가 조선극장을 떠나고 김조성이 다시 조선극장의 주임변사로 옮겨오면서 해를 넘긴 1927년 2월 9일 해결되었다.

차상호가 이끌던 조선극장은 영남 부호 장길상의 후원을 받은 연극인 현철과 김영수가 공동경영자로 참여하면서 자리가 잡히는 듯 보였다. 현철은 극장의 구조조정과 새로운 소재 발굴을 이유로 수개월간 극장문을 닫고 일본으로 출장을 떠났다. 극장운영 경험이 일천했던 현철의 이 같은 행동에 월급이 몇 달씩 밀린 극장종업원들은 쟁의를 벌이게 된다. 결국 현철은 극장 운영을 포기하고 다시 김조성이 조선극장의 운영권을 획득한다.

김조성이 다시 조선극장의 운영권을 인수하는데 이태진을 비롯한 상인들의 자금지원이 있었다. 상인들은 김조성과 동업으로 조선극장의 운영권을 획득하고 극장 운영의 경험이 있는 김조성에게 극장 운영을 맡긴다. 김조성은 외화 배급사들과 특약을 맺고 화제작들을 휩쓸어갔다. 조선극장의 이 같은 저돌적인 운영은 단성사 측과 경쟁을 낳았고 신문지상에는 이 두 극장의 영화획득경쟁이 보도되었다.

김조성의 조선극장 운영은 이태진이 횡령을 이유로 김조성을 고소하면서 6개월 만에 끝난다. 1928년 이태진은 김조성이 운영비 2천여원을 개인적으로 착복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고소했다. 변사 성동호를 비롯한 극장 관계자들의 중재로 고소는 취하되었으나 김조성은 더 이상 조선극장의 운영자가 아니었다. 변사 활동도 막을 내린다.

예원좌, 극작가 김춘광으로

 윤대룡이 연출한 <검사와 여선생>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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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극장에서 쫓겨난 김조성은 두문불출하며 재기를 노렸다. 김조성은 1년여의 방황을 끝내고 무대생활을 시작한다. 1929년, 최초의 가극단체인 금성오페라단의 창립단원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1930년에는 취성좌의 후신인 삼천가극단의 요청으로 비가극 <평화>를 쓰면서 극작도 시작한다. 이 무렵 그는 대표작인 <검사와 여선생>을 완성했다고 한다.

1935년 2월,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희극배우 임생원 등과 예원좌를 조직한다. 김조성은 무리를 해가며 황금좌의 배우 엄재권, 이준희, 송우섭, 허광라, 노재신 등을 전차금을 주고 빼오면서 경찰이 개입하여 공연이 중단되는 소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김조성은 유명 배우들을 빼오는데서 멈추지 않고 연중무휴 공연과 만주를 비롯한 전국 순회를 다니는 등 공격적인 경영으로 예원좌를 당대 유명 상업극단으로 이끌었다. 조선극장을 운영하면서 몸에 밴 승부사 기질이 십분 발휘한 것이다.

관객의 심금을 울리는 김조성의 극작술 또한 큰 몫을 담당했음은 물론이다. 극단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공연되어 돈을 가마니로 긁어모으게 한 <검사와 여선생>, <촌색시>등이 바로 그의 작품이었다.

예원좌가 일반에게 유명 대중극단으로 인정받게 되는 1938년 가을경 그는 이름을 김조성에서 김춘광으로 바꾼다. 자신이 존경하는 춘사 나운규와 춘원 이광수의 이름에서 한자씩을 딴 것이다. 그즈음 전국의 악극단이 100개가 넘었다. 전국의 극장 수가 고정된 상황에서 유력 상업극단으로 성장한 예원좌는 공연할 극장을 잡기 위해 다른 악극단들을 견제할 필요를 절감했다.

김춘광은 극단의 생존을 위해 전국 극장을 정비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그는 황금좌의 대표 성광현과 함께 박진, 이서구, 최독견, 김관수 등과 극단 정비를 위한 단체의 설립을 총독부에 요청했다. 이는 중일전쟁 이후 모든 체제를 전시체제로 재편하려는 총독부의 의도와 맞아떨어졌다.

1940년 총독부 경무과에서는 조선연극협회를 조직하여 100개가 넘는 전국의 극단 중 9개만을 협회에 가입시켜 극단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예원좌도 그 9개 극단에 포함되었다. 총독부의 극단통제로 예원좌에서는 유명 극작가인 박영호, 송영, 임선규 등의 작품을 받아 이서향, 나웅 등에게 연출을 맡기는 등 그 수준을 높일 수 있었다.

공연도 전국을 순회하기보다는 부민관을 비롯한 서울의 주요 극장에서 공연을 올리게 된다. 이러한 성공에는 대가가 따랐다. 일제로부터 적극적인 친일 부역을 요구받은 것이다. 김춘광은 <어머니와 아들> 같은 친일 어용극을 썼으며, 그가 이끄는 예원좌는 협회에서 주최하는 국민극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수상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펼쳤다.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해방되었다. 김춘광은 어용극을 만들던 예원좌를 해산했다. 해방의 기쁨에 들뜬 영화인, 연극인들은 장래 구성될 국가에 이바지 하기 위한 조직을 구성했다. 이는 좌익이 주도했다. 김춘광은 영화건설본부의 조직구성을 위한 회의에 참여하지만 좌익 소장 영화인들이 주장하는 친일영화인 배격, 영화산업 국영화 등의 의견에 반대를 취하며 좌익이 이끄는 어떤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는다.

1945년 10월, 김춘광은 과거 예원좌 출신들을 모아 극단 청춘극장을 조직하고 창단공연으로 <촌색시>를 무대에 올렸다. 김춘광은 예원좌 시절처럼 앞장서 나서지 않고 극단 운영을 매부인 전광남에게 맡기고 자신은 극작에 몰두했다. 1945년 말까지 예원좌에서는 <동방의 길>, <검사와 여선생> 같은 김춘광의 대표 작품을 공연했다.

 <검사와 여선생>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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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광은 좌우의 극단적 대립 속에 우익 연예인의 대표자가 되었다. 1946년 4월, 김관수, 최일, 박구, 박노홍 등과 예원결의친목회를 조직하여 좌익연예인들의 반대편에 활동하기 시작했다. 1947년 11월에는 유치진이 주도한 전국연극예술협회 창립대회에서 부이사장을 맡는 등 대표적인 우익인사로 활동했다.

그 기간 <안중근 사기>, <김상옥 사건> 등 애국선열들의 활동을 조명하는 내용의 작품을 썼으며 청춘극장에서는 애국지사를 다룬 연극과 함께 <미륵왕자>, <사명당>, <운현궁의 봄>, <단종애사> 등 사극을 무대에 올렸다. 당시 평자들은 신파조의 연극에 대해 비판을 했으나 그의 연극 활동은 해방을 맞은 백성으로서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1947년 변사시절 제자인 윤대룡이 김춘광의 대표작 <검사와 여선생>을 영화로 만들고자 스승의 허락을 구한다. 언제나 관객을 몰고 다니던 신파극의 대표작인 이 작품은 김춘광의 제자인 윤대룡에 의해 16밀리 무성영화로 영화로 만들어진다. 당시 열악한 제작환경으로 35밀리 유성영화의 제작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1948년 6월, 우미관에서 개봉된 후 이 영화는 전국을 돌며 관객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1949년 6월, 청춘극장에서는 조건 작 <괴도 일지매>를 국도극장에서 공연 중이었다. 분장실 입구에 있던 김춘광은 모기에 물렸다. 여배우 윤신옥에게 "이거 뇌염모기 아닐까" 농담을 건넸다. 그날 저녁부터 고열이 나기 시작한 김춘광은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으나 알 수 없는 열병으로 7월 19일 사망했다. 장례는 연예계가 총출동되어 홍제동 화장터에서 열렸다. 평소 존경하던 나운규의 장례가 열린 그곳으로 김춘광도 그렇게 떠나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http://movieblog.khan.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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