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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은 죽고 영화의 시대는 열리고...

[한국영화스타11-②] 최초의 한국영화 <의리적 구토>와 김도산의 죽음

07.03.30 18:14최종업데이트07.03.30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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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단, 예성좌, 문예단 등을 조직한 한국 연극의 선구자 이기세. 사진은 1935년경 이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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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산의 개량단은 신극좌로 확대 개편된다. 그러던 중 극계를 떠나 있던 이기세가 다시 극단을 조직한다. 이기세의 새로운 극단은 문예단으로 대구의 유지 정인기의 후원이 있었다.

든든한 후원자를 등에 업은 문예단에 기존 유일단 출신의 배우들이 몰려들었다. 신극좌의 유일단 출신 단원들도 탈단하여 이기세의 문예단으로 돌아가 버렸다. 문제는 문예단으로 떠난 사람들은 극계에서 명성을 떨치던 인물들이었고 신극좌에 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신인들이라는 점이었다.

단원들을 빼앗긴 김도산은 충격과 함께 극단의 존폐를 결정해야 할 기로에 섰다. 그때 변사 김덕경이 김도산을 찾아와 위기를 기회삼아 재기하라고 위로하며 일본인 극장에서 공연되었던 <세도나이까이(瀨戶內海)>와 같은 연쇄극을 해볼 것을 권유했다. 김도산은 마지막 희망을 붙잡는다는 각오로 연쇄극에 도전을 결정한다. 부족한 기술과 자본은 단성사 운영자 박승필을 통해 해결하기로 하고 김덕경을 통해 박승필과 교섭하였다.

1917년 단성사의 운영권을 인수하여 1년여의 공사를 마치고 상설영화관으로 재탄생시킨 박승필은 외국영화의 상영뿐만 아니라 조선인의 손으로 만든 영화의 상영을 꿈꿨다. 하지만 아직 여건이 미비했다. 기술도 기술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박승필은 거대한 자본이 드는 영화제작은 유일한 조선인 흥행자본가인 자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연쇄극의 재정 후원자가 되어 달라는 김도산의 제안을 박승필은 흔쾌히 승낙했다. 김도산과 박승필의 다리 역할을 했던 김덕경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 촬영기사를 초빙해 왔다. 최초의 연쇄극은 이미 우미관에서 공연한 바 있는 <의리적 구토>였다.

촬영이 시작됐다. 장충단에서 서빙고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영화촬영을 구경하는 사람들로 장사진이었다. 안종화는 자신이 쓴 <한국영화측면비사>에서 이 최초의 영화촬영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이들 군중의 시선은 저마다 포장을 젖힌 15년식 포드 자동차에 쏠리고 있었는데, 그들이 유난히 눈여겨보는 것은 그 차에 타고 있는 세 명의 괴한이었다. 그들은 제작기 일본식 '합비'에 '당꼬 즈봉'을 입고, 허리에는 번쩍거리는 장도를 차고 있었다. (중략)

괴한들이 산허리로 돌아가자 얼마 후, 조금 떨어진 숲속에서 호각 소리와 함께 청년 하나와 불란서제 목조촬영기를 멘 기사가 나타났다. 캡을 둘러 쓴 사람은 일본인 카메라맨이었고, 얼굴이 거무잡잡하고 키가 작달만한 젊은 청년은 당시 단성사에서 명성을 떨치던 해설자의 원로 김덕경이었다. 덕경의 임무는 현장지도와 통역이었다."

야외 촬영이 끝났다.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는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상연되었다. <의리적 구토>는 연쇄극으로 연쇄극은 연극의 일부 장면을 영화로 보여주는 일종의 키노드라마였다.

<의리적 구토>의 공연 모습을 살펴보면 배우들이 연기를 펼치다 무대 밖으로 사라지고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무대 위에서는 스크린이 내려온다. 다시 호루라기 소리가 나면 무대 밖으로 사라진 배우들이 등장하는 영화가 영사된다. 자동차 추격장면, 격투장면이 보여지고 다시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스크린이 사라지고 배우들이 무대에 등장 다시 연기를 펼치는 식이었다.

공연은 대성황이었다. 신극좌에서는 <의리적 구토>에 이어 바로 <시우정>, <형사고심> 등을 연쇄극으로 공연하였다.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연쇄극에 관객들은 열광했다. 비싼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단성사에는 연쇄극을 보기 위한 관객들로 연일 만원이었다. 박승필이 거액 5000원을 투자하여 만든 연쇄극은 대성공이었다.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의 신문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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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은 연쇄극의 해였다. 연쇄극으로 이름을 떨친 김도산은 전성기를 맞았다. 연쇄극의 성공과 더불어 치솟는 인기로 따르는 기생들이 많았다. 기생들은 극장 앞에 인력거를 대기시키고 스타를 모시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김도산이 만든 연쇄극에서 주인공을 도맡았던 이경환과 극단 대표인 김도산은 기생들 품에서 살았다.

<의리적 구토>의 성공에 자극받은 이기세의 문예단과 임성구의 혁신단에서도 연쇄극 제작에 착수했다. 1920년에는 당시 4극단으로 불리던 혁신단, 신극좌, 문예단, 취성좌 중 김소랑(김현)이 이끄는 취성좌를 제외하고 3대 극단에서 모두 연쇄극을 제작하였다. 왕년의 스타 임성구는 박승필의 후원으로 연쇄극을 만들었다. 이기세는 자신이 마련한 돈으로 연쇄극을 제작하여 우미관에서 공연했다. 물론 대부분의 작품은 박승필의 재정적 후원에 힘입은 김도산의 신극좌에서 나왔다.

그러나 연쇄극에 대한 관객들의 폭발적인 관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호기심에서 한두 번 접했을 뿐 대부분의 관객들은 비싼 입장료를 내고 연쇄극을 보기보다는 서양의 활동사진을 보길 원했다. 이기세의 문예단은 연쇄극인 <지기>를 공연하고 얼마 있지 않아 극단을 해산했다. 연쇄극에 대한 폭발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작품을 만들었으나 큰 손해를 보게 되자 더 이상 극단을 운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문예단 단원들은 김도산의 신극좌에 흡수되었다. 김도산의 신극좌도 더 이상 연쇄극을 만들 수 없었다. 김도산이 촬영도중 큰 부상을 입은 것이 한 이유였고 더 큰 이유는 비싼 제작비와 격감하는 관중으로는 도무지 수지를 맞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쇄극의 전성기는 너무나 짧게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1921년 7월 26일 김도산은 늑막염으로 31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연쇄극 촬영도중 당한 부상이 원인이었다. 매일신보의 부고기사에는 김도산의 죽음 당시 신극좌는 인천 공연 중이었는데 좌장의 죽음 소식을 듣고 단원들이 서울로 급히 돌아왔으며 각 신파단체에서는 연합하여 성대한 장의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 해 11월 20일, 혁신단을 이끌던 임성구 또한 폐결핵으로 운명을 달리했다. 임성구는 폐결핵에 시달리면서도 무대에 섰는데 그 야윈 얼굴을 감추기 위해 입에 솜을 넣어 볼을 불룩이 하여 분장했다고 한다. 신파극의 도입과 전파에 힘을 쏟았던 김도산과 임성구의 죽음은 신파극과 연쇄극 시대의 끝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으며 신극과 영화의 시대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얼마 있지 않아 연극과 영화의 시대가 찾아왔다. 1923년 2월, 최초의 신극단체인 토월회가 박승희에 의해 탄생했다. 토월회의 탄생은 임성구, 김도산의 신파극처럼 희곡 없이 대략의 줄거리를 가지고 무대에서 즉흥연기를 펼치는 수준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희곡을 바탕으로 잘 짜여진 무대와 연출, 계산된 연기로 연극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동년 4월에는 최초의 극영화인 <월하의 맹세>가 윤백남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극영화의 탄생은 연극의 부속물인 연쇄극의 형태로 탄생한 조선영화가 영화로서 자기 모습을 찾아간 것이었다.

신파극의 시대를 열었던 김도산과 임성구의 갑작스런 죽음과 새로운 시대의 등장은 너무나 운명적이었다. 무대에서 마지막 대사를 마치고 커튼 뒤로 사라지는 배우의 숙명처럼 김도산과 임성구는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더 이상 해야 할 대사가 없어진 배우가 되어 운명처럼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사라진 것이다. 천생 연극인의 인생을 타고 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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