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야구사상 가장 우아한 스윙, 라파엘 팔메이로 ③

[블루그라운드가 뽑은 한미일 야구스타 100人 이야기 1]

06.02.11 14:55최종업데이트06.02.11 14:57
원고료로 응원
2005년 8월 4일. 라피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내(Lynne)와 두 아들(Patrick, Preston)은 매우 혼란한 상태였지만 라피에겐 내색을 하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있었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그들은 다정하게 라피를 대하려 했지만 라피의 굳게 다물어져 있는 입술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날 경기는 출장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라피가 우릴 속일 수 있단 말인가?

2일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충격적인 라피의 약물복용 사실을 발표한 후, 그에게 쏟아진 이틀간의 비난과 성토는, 그의 42년 일생동안 모두 쏟아진 찬사와 환호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페라리가 절벽 끝으로 달리는 순간이었다.

'라피는 희대의 거짓말쟁이' '약물로 만들어낸 500홈런-3000안타' '뻔뻔하게도 의회에서 위증한 사나이' '라피가 가야할 곳은 명예의 전당이 아니라 감옥'

유명 스포츠지와 일간지에서는 연일 라피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칼럼과 기사가 넘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기사 중에서도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건 다름 아니라 팬들의 절망이었다.

'어떻게 라피가 우릴 속일 수 있단 말인가?'

라피의 팬을 떠나 모든 야구팬이 이번 사건에 낙담한 건 그 대상이 라피였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에게 특히나 친절했고 청소년을 위한 기부와 자선에 앞장섰던, 그리하여 모든 시민들의 귀감이 되던 바로 그 사나이가 미국 스포츠계에선 마약과도 같은 스테로이드(steroid)를 복용했다란 사실에 그들은 아연실색 할 수밖에 없던 일이었다.

게다가 동료선수들은 성실함과 꾸준함의 대명사였던 라피를 야구인생의 모범으로 삼고 있었던 바, 그가 약물로 자신의 캐리어를 달성했다란 지탄과 의혹은 커다란 실망으로 다가오는 일이었다. 라피에게 찬사를 보냈던 칼럼니스트들은 마치 등 뒤에서 칼이 찔린 듯 아무소리도 내지 못하고 쓰러질 뿐이었다.

'우리들이 이 사건에 신물이 나는 건 스테로이드 덩어리에 튜바(tuba)처럼 텅 빈 머리로 마이크만 잡으면 허풍이나 날리던 칸세코란 작자가 실은 그만이 진실을 이야기했다란 점이다'

메이저리그 칼럼니스트 윌리암 니슨의 말이다.

그랬다. 정작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건 결과적으로 '라이어(거짓말쟁이)'가 뒤바뀐 반전 때문이었다.

칸세코의 폭로. 누가 거짓말쟁이인가

사건의 출발은 이러했다.

2005년 2월 14일 미국 CBS의 유명 시사프로그램 '60분(60 minutes)'. 출연자는 은퇴한 야구스타 호세 칸세코(Jose Canseco Capas)였다.

호세 칸세코(Jose Canseco Capas). 1988년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로 40홈런-40도루(42홈런 40도루)를 기록했던 파워와 스피드를 겸비한 야구스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선수시절 마크 맥과이어와 함께 '베쉬브라더스'란 명성아래 상대 투수진을 공포에 떨게 했던 슬러거. 아메리칸리그 신인왕과 1988년 아메리칸리그 MVP를 차지했으며 통산 올스타 선정 6회에 빛나는 사나이.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를 두 개나 끼고 있는 이 쿠바계 미국인의 출연은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야구사에 남을 훌륭한 선수임에도 난잡한 사생활과 사려 깊지 못한 언행으로 야구팬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지 못하였던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기위해 '60분(60 Minutes)'에 출연했는지 모든 미국인의 시선이 TV브라운관에 집중되었다.

'60분이 이젠 쓰레기 책도 홍보해주는 모양이군' 미 공화당 켄터키주 상원의원 짐 버닝(Jim Bunning)은 힐끗 TV를 바라보다 무심코 중얼거렸다.

칸세코는 이미 출간 예정인 자신의 자서전 '약물에 취해(Juiced: Wild Times, Rampant 'Roids, Smash Hits & How Baseball Got Big)'를 홍보하고 있던 참이었다. 책의 내용은 칸세코 본인의 약물복용 사실과 유명선수들에게 자신이 직접 약물을 권유하고 투입까지 해줬다는 놀라운 고백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나 마크 맥과이어(Mark McGwires)와 이반 로드리게스(Ivan Rodriguez) 등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들이 자신과 약물친구였음을 폭로하는 대목은 많은 야구팬들에게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올 만한 것이었다. 물론 칸세코의 폭로명단에는 라피의 이름도 올려져 있었다. 책을 출간하기도 전에 미국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온 칸세코의 자서전이 드디어 베일을 벗으려는 순간. 칸세코가 '60분(60 Minutes)'에 출연한 것이었다.

노련한 진행자 마이크 월러스(Mike Wallace)가 칸세코에게 질문한 핵심은 두 가지.

'당신이 폭로한 유명 야구스타들이 정말 스테로이드를 복용했단 말인가?' 그리고 ' 현재까지도 스테로이드를 복용하는 플레이어들이 있단 말인가?'

칸세코는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성량으로 모두 'YES'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칸세코는 자신이 폭로했던 마크 맥과이어와 제이슨 지암비(오클랜드 시절 동료선수들), 이반 로드리게스, 라파엘 팔메이로, 후안 곤살레스(텍사스 시절 동료선수들) 등의 이름을 차례대로 열거하며 이들의 약물복용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칸세코는 선수들이 약물을 복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약물이 가져다주는 육체적 능력향상과 심리적 자신감이라며 자신도 약물로 인해 대스타가 될 수 있다고 자인하였다. 소문만 무성했던 미국 스포츠계의 약물복용 실태가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방송이 나간 후 미국사회는 신호등이 고장난 러시아워(rush hour)처럼 엄청난 혼란에 빠지고 만다. TV를 지켜보던 상원의원 짐 버닝에게도 그것은 놀라운 것이었다.

충격적인 방송이 나간 후 대부분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칸세코는 돈에 눈이 먼데다 동료였던 맥과이어를 향한 억제할 수 없는 질투심에 말도 안 되는 책을 발간한 멍청이'란 입장과 '약물복용이란 암흑의 관행을 폭로한 최초의 메이저리거'란 입장, 바로 그 두 가지였다.

그러나 두 입장 모두 칸세코를 용기있는 의인(義人)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칸세코가 열거한 모든 선수들이 부인을 하고 토니 라루사와 같은 야구계 거물들이 그를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지자 칸세코의 폭로는 해프닝으로 그치는 듯 싶었다.

사람들은 칸세코가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되풀이한다며 그를 호도하기까지 했다. '유명선수들의 약물복용 증거를 눈앞에 내놓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란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칸세코는 라이어(liar)가 돼가고 있었다(공교롭게도 이같은 상황은 대서양을 건너 10개월 후 한국에서 스테로이드가 줄기세포로 바뀐 채 거의 같은 모습으로 재연한다.)

그러나 한 사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던 왕년의 스타 상원의원 짐 버닝 만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직감하고 있었다. 그는 동료의원들에게 미국 스포츠계에 만연해있는 '약물복용'을 지금이라도 이슈화하지 않으면 많은 청소년들이 '약물에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스테로이드는 마약과 같은 셈이었다.

스테로이드 청문회 개최, 실패와 좌절

드디어 2005년 3월 17일 미(美)하원 개혁위원회가 주도한 스테로이드 청문회가 열린다. 이 자리엔 미 하원의원과 메이저리그 고위관계자 그리고 유명 메이저리거들과 의학전문가들이 참석하여 열띤 토론을 벌인다. 관심의 집중은 청문회에 출석한 유명 스타들.

최대 관심을 모았던 마크 맥과이어는 자신이 약물과는 무관하다며 울먹이기까지 했다. 그는 그저 '나는 은퇴한 선수에 지나지 않는다'며 정확한 답변을 피했는데 이는 다른 스타들과 마찬가지였다. 마크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Sammy Sosa), 커트 실링(Curt Schilling), 프랭크 토마스(Frank Edward Thomas)는 모두 한 학급에서 교육받은 아이들처럼 똑같은 자세와 똑같은 내용으로 약물복용사실을 전면부인하며 오히려 미국 스포츠에서 약물이 사라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 버드 셀릭(Bud Selig)과 선수노조 위원장 도널드 피어(Donald Fehr) 등과 공동으로 입을 맞춰 진화된 약물검사와 엄정한 처벌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출석자 중 가장 선량한 피해자로 꼽히던 라피는 의원들을 향해 손가락을 올리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칸세코가 자신을 약물복용자로 지적한 것은 잘못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했고, 메이저리그의 약물검사가 올림픽의 도핑테스트처럼 보다 철저해져야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소문만 있고 증거는 없다. 94년 메이저리그 파업 이후, 절벽에 매달린 야구를 구해준 맥과이어. 거기다 라피가 혐의를 받고 있는 것도 좋지 않은 증후다. 사람들은 이들이 약물을 복용했을 것이라 아무도 믿지 않으려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칸세코가 본즈(Barry Bonds)를 지목했다면 최소한 기자들과 컬럼니스트이 붙들고 늘어졌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청문회에 소득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윌리암 니슨의 말이다.

실제로 청문회는 청소년 선수들의 약물복용이 10년 새 3배나 증가하고 이의 피해가 누적되고 있다란 사회적 경고를 제외하곤 아무 성과도 없이 막을 내렸다. 그렇게 칸세코가 제기한 약물파동은 세간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러나 2005년 8월 2일. 결국 진실은 칸세코 편이었음이 밝혀진 것이었다.

재앙과 같은 악수(惡手)의 연속

라피는 이후 남은 시즌에 출장하지만 거짓말쟁이라는 비난과 위증혐의자로 몰리며 참담한 성적을 보여준다. 볼티모어는 부진을 거듭하던 그에게 출장을 허용하지 않고 그는 결국 벤치신세가 된다. 여기까지였다면 그래도 라피에겐 행운일 수 있었다. 아직 볼티모어 구단은 그에게 신뢰를 보내주었고 동료선수들은 언론을 통해 라피를 적극적으로 옹호해주었다.

후안 곤살레스(Juan Gonzalez)와 칼 립켄 주니어(Cal Ripken Jr)는 '우리가 아는 팔메이로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며 충분히 시간을 갖고 판단해야할 문제'라며 성급한 일반화를 경계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라피는 재앙과도 같은 실수를 거듭한다.

언론의 집요한 입장표명에 부인과 모르쇠로 일관하던 그는 '징계는 수용하겠으나 정말로 약물이 어쩌다 내 몸에 들어갔는지는 모르겠다'란 말을 하고 만다. 이같이 모호한 입장은 라피를 '단순 거짓말쟁이(라이어)'가 아니라 반성할 줄 모르는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로 발전시키는 악수(惡手)가 된다. 그러나 가장 큰 악수는 동료선수 미구엘 테하다(Miguel Tejada)를 거론한 점.

라피는 10일간의 출장정지가 확정된 후 중재위원회에 재심을 청구하면서 '팀 동료로부터 문제의 물질을 건네받았다'고 주장했었다. 당시엔 거론된 팀 동료의 이름과 문제의 물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라피가 팀동료의 실명을 미구엘 테하다라고 공표한 것이었다.

미구엘 테하다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유격수로 꼽히는 선수였기에 그 파장은 갈수록 커져갔다. 게다가 테하다는 라피를 인생의 스승이자 가장 훌륭한 선배선수로 꼽고 있던 터였기에 테하다 본인도 놀랄 일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지금 쇼크 상태다. 벌써 3번이나 약물검사를 받았었고 문제도 없었다. 라피한테 전해준 B12는 오래 전에 준 비타민이고 합법적인 제품으로 스테로이드와는 무관하다." 테하다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라피가 어째서 자신을 지목했는지 모르겠다고 주장했다.

이제 라피의 실언은 후버댐이 무너진 것처럼 주워 담을 수 없게 되었다. 샘 펄로조 볼티모어 감독대행은 분노에 찬 음성으로 팀동료를 팔아먹은 라피가 더 이상 볼티모어의 구성원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공표했다. 그 공표는 사실이 되었고 볼티모어는 그간의 신뢰는 중단한 채 라피에게 락커룸을 비워 달라 요청한다.

그 이후, 라피는 가을바람의 먼지처럼 존재감 없이 그라운드에서 사라졌다. 새 시즌을 불과 두 달도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 그는 아직 팀도 구하지 못한 상태다.

야구비평가들은 이제 그를 가리켜 '역사상 가장 우아한 스윙의 소유자'가 아니라 '역사상 가장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로 부르고 있다.

명예의 전당은 고사하고 그간 그가 세웠던 모든 기록은 말끔히 소각하여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란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동료들과 친구들은 그에게 등을 돌린 지 오래이며 팬들은 라피를 비아그라 광고에 출연한 얼간이로만 기억하려는 태세다.

역사상 가장 우아한 스윙의 소유자인가? 파렴치한 거짓말쟁이인가?

2006년 1월. 라피는 두 아들을 데리고 지난 날 그가 아버지 호세와 캐치볼을 주고받던 마이애미의 로베르토 클레멘트 공원(Roberto Clemente Park)을 찾았다. 거기서 한참이나 라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지난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고 있었다. 이윽고 가볍게 그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고 겨울바람이 그의 눈가를 스칠 땐 따뜻한 물방울이 대기를 따라 흘렀다.

"아빠 자, 받아요" 그 때 막내아들 프레스톤이 저 멀리서 공을 던지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라피 옆에 서있던 큰아들 패트릭은 라피의 어깨를 감싸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빠가 그랬잖아요. 야구는 아빠인생이라고"

라피는 막내아들 프레스톤이 던져 준 공을 받으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두 아들을 바라보다 힘껏 공을 움켜쥐었다.

인생이란 야구경기에 그는 홈런도 날리고 안타도 치며 때론 삼진도 당하고 병살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몸을 날려 아웃을 시키기도 했고, 가랑이 사이로 흐르는 공을 지켜보는 에러를 범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겐 언제나 다음 이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낙담하지 않았으며 그런 이유로 실패가 끝이 아니라고 되뇌었다.

그는 과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수 있는가

지금으로부터 20년 후, 당신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후보자를 선택할 수 있는 투표권자가 되어 있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모든 기회를 소진한 한 사나이의 이름이 당신의 예상 투표지에 적혀져 있다. 그의 이름은 '라파엘 팔메이로'

이제 당신에겐 마지막 선택만이 남아 있다. 자, 이제 어쩌겠는가?

통산 500홈런-3000안타를 기록한 역사상 네 번째 사나이의 이름을 투표지에 받아 적겠는가, 아니면 메이저리그 역사상 약물스캔들로 일생을 날려버린 첫 번째 사나이의 이름을 지우개로 지우겠는가?

여기서 라파엘 팔메이로의 이야기는 끝이다.

▲ 라파엘 팔메이로
ⓒ 作 박동희


덧붙이는 글 | 지금까지 '라파엘 팔메이로 편'을 관심있게 지켜봐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리며 다음 편 '모두가 환영한 해결사, 한대화'로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6-02-11 14:55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지금까지 '라파엘 팔메이로 편'을 관심있게 지켜봐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리며 다음 편 '모두가 환영한 해결사, 한대화'로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