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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폭군과 간 큰 광대의 불꽃 튀는 한판

<왕의 남자>, 대작 영화가 아니더라도 이야기만 있다면...

05.12.30 15:48최종업데이트05.12.30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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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왕 가운데, 조나 종이 안 붙은 왕은 누구지?"

태조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왕까지 읊어라 그러면, 못 읊는 이가 많을지 몰라도, 이 질문에는 대부분 어렵지 않게 대답하리라 본다. 단 두 명뿐이었고, 역사는 승자의 시각에서 쓰여지기 마련이라, 둘 다 폭군 중의 폭군으로 묘사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중 한 명인 광해군은 그 시대적 흐름을 미리 읽고 중립적 외교를 편, 아까운 인재라는 재조명이 있었지만, 다른 한 축을 차지하고 있던 연산군은 여전히 폭군으로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왕의 남자>는 바로 그 연산군을 상대로 한 판 놀아보려는 광대들의 이야기다.

▲ 왕인 듯하면서 아닌 듯한 연산군, 광대의 티를 벗지는 못하나 양반보다 더 강한 자부심이 있는 광대라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인물이 정진영과 감우성의 열연으로 살아났다.
ⓒ 시네마서비스
왕이 있고, 그 왕을 희롱하는 간 큰 광대가 있고, 그 광대 옆에는 여자보다 태가 곱다는 광대가 있으며, 그 광대들을 이용해 왕이 깨닫기를 바라는 내관이 있으며, 또한 그 광대들이 못 마땅한 왕비가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왕의 남자>는 이것이 전부이다.

<해리포터와 불의 잔>을 시작으로 <킹콩> <태풍> <나니아 연대기>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영상에 눈이 어질어질해진 관객들에게 <왕의 남자>가 성큼 다가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시공을 오가는 앞서 말한 영화들에 비해 <왕의 남자> 공간은 궁궐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앞서 말한 영화들처럼 화려하게 보여줄 장면들이 없기에, <왕의 남자>가 힘을 갖기 위해서 이야기가 관객에게 설득력있게 다가가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또한 쉬워 보이지 않는다. 광대들이 신명나게 노는 판을 벌이는 모습을 그려내기는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옛 것에 대해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 자칫 잘못하면 그 이야기는 따분하고도 따분한 이야기로 흘러갈 위험성이 크다.

본래 연극이 원작인 <왕의 남자> 이야기는 시각만을 만족시켜주기를 원하지 않는 연극판에서는 충분히 통할 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그 이야기가 통할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연극에서는 관객과 배우의 공간적 거리가 거의 존재하지 않기에 같이 호흡할 수 있지만, 영화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연극 무대를 영화로 옮겨왔을 때 성패를 가름하는 건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결국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건 배우들의 역량이 그 이야기를 얼마나 담아 영상으로 보여주느냐에 달렸다.

그렇기에 <왕의 남자> 줄거리는 간단한 듯 하지만, 그 이야기를 영상으로 풀어내는 일, 특히 배우들이 그 인물들을 연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설득력을 얻고 못 얻고의 성패는 배우들의 역량, 그 중에서도 연산군과 광대 장생을 어떻게 표현했느냐에 달려있다. 왕이라면 무릇 위엄이 있을 것이나, 폭군으로 기억되는 왕이라면 정신병적 기질도 분명히 있었을 터, 그런 왕이 쓰는 어투는 어떠할 것인가.

연산군에게는 분명히 아픔이 있다. 그 아픔으로 인해 성격이 괴팍해져 왕답지 못했을지도 모르나, 조선시대 왕의 자리에 앉기 전에는 분명 제왕이 되는 법이 있었을 것이고, 법도를 억지로라도 익혔을 터 분명 왕의 모습이 느껴지는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역사가 승자의 시각에서 기록된다는 것을 본다면, 더욱더 그러했을 터.

이 쉽지 않은 연산군을 그려내는 작업을, 정진영이 맡았다. 그리고 난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왕인 듯하면서도 왕으로서 부족해 보여야 하고, 다소 망나니 같아 보이면서도 그렇지 않아 보여 자칫 잘 못하면 보는 관객들에게 이도 저도 아닌 연산군의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었지만, 그는 그런 관객들의 우려를 말끔히 치워버린다. 오히려 조선시대 역사를 잘 모르는 자라 할지라도, 그가 연기하고 있는 연산군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 한 구석으로 연민이 생길 지경이다.

▲ 연산군, 그 복잡한 내면을 얼굴로 드러내보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 시네마서비스
광대가 왕을 무대로 판을 벌여야 하는 만큼, 왕이 그 광대를 받아들일 만한 인물이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설득시켜야 하는 싸움에서 정진영은 결코 밀리지 않았다.

그리고 광대를 받아준 왕도 중요하지만, 그 왕을 갖고 놀려고 한 간 큰 광대를 어떻게 담아내느냐도 <왕의 남자>에서는 중요한 부분이다. 천한 신분인지라, 왕을 보면 오금이 저릴 것이 당연하겠지만 또 왕을 갖고 놀겠다는 생각으로 고위층보다도 배포가 더 크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광대는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연산군보다도 더욱 어려운 배역일지도 모른다. 흔히 '겸손하되 비굴하지 않고, 자신감 있되 자만하지 말며'라는 말들을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연산군 정진영의 반대편 간 큰 광대 장생에는 다행스럽게도 감우성이 대칭축을 이룬다. 잘 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그가 연기하는 동안 그가 장생인지, 장생이 그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광대이면서도 삶의 밑바닥에 떨어져 있으면서도 초연한 듯한 태도, 절망적 상황에서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여유는 간이 크다는 말보다 어떤 면에서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에서부터 자포자기, 관조에까지 이르는 감정을 담아내야 하기에 쉽지 않은 일이다. 감우성에게 개인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보는 이에 따라 다르다는 점을 고려한다 해도 낙제점을 받기는 힘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왕의 남자>가 연극이 아닌 영화로서도 관객들에게 설득력을 갖게 된 건, 그 중간에 왕의 남자 공길이나 장녹수 역을 한 강성연, 광대를 안으로 불러들인 왕의 측근을 연기한 장항선 등이, 정진영과 감우성의 불꽃 튀는 카리스마로 둘 만의 영화가 되지 않게 받쳐주었기에 가능했다.

▲ 왕의 남자에서는 두 주연배우 이외에도 조연들이 그 맛을 더해준다.
ⓒ 시네마서비스
<왕의 남자>는 영화임에도, 다시 찍을 수 없기에, 배우들간의 호흡이 매우 중요한 연극판 같은 느낌을 준다. 결국, 관객들이 <왕의 남자>에 빠져들 수 있게 한 건, 두 주연 배우 외에도 그 밖의 조연과 단역들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대작영화들 가운데서 의외의 선전을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하게 한다. 특히, 서사구조를 중요시하는 우리나라 관객들의 입맛에 더욱 잘 맞을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전 사실 정진영이라는 배우는 좋아하는 편이기 때문에 다소 후한 점수를 주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우성의 연기는 영화로는 자주 접해 보지 못했지만, 이번만큼은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네요.

2005-12-30 15:48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전 사실 정진영이라는 배우는 좋아하는 편이기 때문에 다소 후한 점수를 주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우성의 연기는 영화로는 자주 접해 보지 못했지만, 이번만큼은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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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넓게 보고 싶어 시민기자 활동 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여행 책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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