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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피해 간 역도산의 친북 행적

[심층분석] 영화 <역도산>, 그리고 들려주지 않은 이야기

04.12.31 00:24최종업데이트05.01.03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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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의 일대기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라 치열하게 살다간 한 남자의 이야기다... 이국땅에 살아남기 위해 애썼던 <대부2>(1974)의 로버트 드니로같은 느낌을 살리고 싶다."

송해성 감독은 촬영이 한창이던 지난 여름, 영화 <역도산>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한일합작 영화 '역도산'- <국민일보> 7월9일자)

영화 <카라>(1999)로 데뷔해 '삼류 건달의 밑바닥 인생을 밀도있게 그려냈다'는 평을 얻은 <파이란>(2001)으로 이름을 알린 송해성 감독. 그는 <역도산>을 통해 '낯선 땅에서 비열함을 무릅쓰고 싸워 성공한 이가 더 비열한 사회에 의해 제거되는 이야기'를 들려주려 했다. 실제 영화는 정확히 그러하다.

영화는 1950, 60년대 일본에서 활약한 전설적인 프로레슬러 역도산(본명 김신락)의 성공과 죽음을 담고 있다. 1940년 스모선수가 되기 위해 고향인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 신풍리를 떠나 일본으로 건너온 역도산.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온갖 멸시와 조롱에 시달리지만 그는 스모의 천하장사격인 요코즈나를 꿈꾸며 운동에 전념한다.

하지만 순수 일본인이 아니면 요코즈나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는 스모를 접고 술에 절어 하루하루를 보낸다. 우연히 접한 프로레슬링에 심취한 역도산은 미국으로 건너가 프로레슬링 선수로 활약하게 되고 1952년 유명 프로레슬러로 금의환향한다.

그 후 프로레슬러이자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며 일본 국민들의 폭발적인 사랑과 막대한 부를 한 손에 거머쥐지만 성공과 승부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고립되어 가는 역도산. 그는 결국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실제 역도산은 당시 봉투에 이름 석자만 써도 편지가 배달될 정도의 국민적 영웅이었다. 그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도쿄 신바시역 서쪽 광장에 설치된 가두 텔레비전 수상기 앞에 2만여 시민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지난 8월 개봉한 영화 <바람의 파이터>의 실제 모델이자 생전에 역도산과 애증관계로 얽힌 또 하나의 조선인 최영의(최배달)는 "(역도산이) 살아있어 정계에 투신했더라면 일본의 총리대신(수상)쯤은 지내지 않았을까"하며 그의 때이른 죽음을 아쉬워했다 한다.(책 <불꽃같은 삶 역도산> 6쪽- 고두현 지음, 스크린M&B 펴냄)

50년대 일본에 텔레비전 구입붐을 일으킬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조선인 역도산. 거구의 미국 레슬러들을 통렬한 '가라데 촙'(당수)으로 날리는 역도산의 모습은 2차대전 패전과 뒤이은 7년간의 미군정으로 미국에 대한 굴욕감과 실의에 빠져있던 일본 열도를 들썩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굳이 설명이 필요없는 배우 설경구와 일본영화 <링>시리즈(1998), <호텔 비너스>(2004), 텔레비전 드라마 <한여름 밤의 메리 크리스마스>, <사랑의 톱 레이디> 등에 출연한 일본 정상급 여배우 나카타니 미키가 역도산의 두번째 부인 '아야'로 등장하고 역도산의 후원자로 시작해 결국 애증관계로 얽히게 되는 '칸노 회장'역에 영화 <감각의 제국>(1976), <열정의 제국>(1978)에서 주연을 맡은 중견배우 후지 타츠야 등이 출연해 탄탄한 연기를 보여준다.

설경구와 일본 정상급 배우의 열연 돋보여

홍보 단계에서의 초점은 주연을 맡은 설경구와 '한일합작'에 맞춰졌다. 그가 촬영을 위해 몸무게를 몇 달만에 94kg으로 늘린 점이나 대사의 97%나 되는 일본어를 '몸불리기' 못지 않은 열정으로 연습해 현장 일본 스태프들 사이에 '마음을 움직이는 일본어'라는 평을 들었다는 등 설경구의 연기에 대한 열정이 영화 <역도산> 홍보의 주된 재료였다.

영화 대사가 거의 모두 일본어고 한글자막이 아래로 흐르게 된 데는 일본에서 활동했던 역도산에 대한 사실감을 높이기 위함이었다는 제작사측의 설명. 그러나 무엇보다 한일합작으로 제작된 영화답게 일본시장을 염두에 둔 데 따른 것이다.

이 때문에 영화가 조국에 대한 고민이나 역도산의 정체성에 대해서 슬쩍 비켜 서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해 보인다. 고향에 대한 향수조차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한일합작 영화속에 '낯선 땅에서 성공을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역도산'을 그리기 위해 영화는 그의 조국과 민족을 포기했다.

영화에서 역도산은 북으로 돌아가자는 고향 친구에게 말한다.

"조선이 나한테 해준 게 뭔데. 난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세계인이야."

'욘사마'를 필두로 한 일본에서 부는 '한류열풍'속에 일본 흥행을 고대하는 제작사로서는 역도산의 정체성에 대한 고뇌는 가당찮은 주제였을 것이다.

차승재 대표는 실제로 <역도산> 한일 합작 배경에 대해 "그의 친북행적이 일본 우익의 반발을 살 우려가 있는데다 죽음이 야쿠자와 관련돼 일본측에서 독자적으로 제작하기는 껄끄러운 인물일 것"(국민일보 위 기사)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영화는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나 의문에 싸인 죽음과 같은 '껄끄러운' 문제를 피해갈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시장 겨냥해 껄끄러운 문제 피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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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역도산>이 비켜간 역도산의 행적 중 대표적인 몇 가지를 추적해보는 것은 그의 인생을 파악하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역도산 생전의 행적 중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단연 북과의 관계다. 그의 죽음 또한 이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영화속 '아야'로 그려진 두번째 부인 오자와 후미코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남 모모타 요시히로(2000년 작고)는 생전에 영화로 제작하는 것을 가장 반대해 왔으며 특히 역도산과 북과의 관계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던 듯하다.

1995년 4월 28일 북측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위원장 김용순)와 일본의 신일본프로레슬링주식회사(대표 이노키 간지)가 공동 주최하고 북측 국가체육위원회(위원장 박명철)가 후원하는 '평화를 위한 평양 체육 및 문화축전'이 평양 5·1경기장에서 수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개최됐다.

이 축전의 중심행사로 미국·일본·멕시코 프로레슬러 27명이 출전하는 프로레슬링경기가 진행됐는데 이노키 간지(일명 안토니오 이노키) 참의원이 행사준비와 관련해 그 해 2월 24일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열자 장남 모모타 요시히로와 일본의 유족들은 같은 날 기자회견을 열어 북측과 이노키 간지 의원에게 "아버지 역도산을 이용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기자회견에서 모모타 요시히로는 "아버지는 북쪽인 함경남도에서 태어나기만 했을뿐 공산주의를 가장 싫어했다"면서 "북한이 역도산을 도와주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북, 역도산 이용말라"- <세계일보> 1995년 2월25일자)

2003년 <내 남편 역도산>(한성례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던 그의 세번째 부인 다나카 게이코도 자신의 출판기념회에서 기자들에게 "그는 자유사회의 이상을 사랑했다"면서 "그는 북한에 대한 지지자가 아니었고 공산주의자도 아니었다"고 말한 바 있다.

항공사 여승무원 출신으로 역도산이 숨지기 전까지 6개월 간 결혼생활을 한 다나카는 "역도산이 미국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숭배했다"고 말하고 역도산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소문을 일축했다.("역도산은 자유를 사랑했다"- <연합뉴스> 2003년 7월20일자)

하지만 역도산은 생전에도 이미 북에서 영웅이었다.

"김일성 주석의 배려로 큰아버지(역도산의 큰형) 항락은 평양체육과학연구소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저는 평양체육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순일이 쓴 <영웅 역도산>(원제 '또 하나의 역도산', 육후연 옮김, 미다스북스 펴냄)은 역도산의 딸 김영숙과 한 인터뷰에서 '영웅이라면 그 가족을 소중히 해야 할 것이니 김일성 주석은 북한에 사는 역도산의 가족을 찾아냈다'고 적고 있다.(위 책 93쪽)

1961년 후쿠시마현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3세로 월간지, 주간지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이순일의 책 <영웅 역도산>은 "역도산의 출생지인 북한과 그가 활약했던 일본, 한국을 넘나들며 광범위한 자료조사를 통해 영웅적이면서도 고독했던 한 인간의 면모를 입체적으로 그려냈다"는 평을 얻기도 했다.

한편 일본 소설가 무라마쓰 도모미가 쓴 책 <조선청년 역도산>(오석윤 옮김, 북@북스 펴냄)에서는, 고향을 떠나기 전 첫번째 부인 방신봉과의 사이에 딸 김영숙을 두었는데 61년 편지를 받고 니가타 항에 정박된 연락선에서 역도산이 딸과 상봉했다는 소문에 대해 '당시 바쁜 일정으로 연락선 상봉은 믿기 어렵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영웅 역도산>은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와 함께 '역도산의 3대 제자'로 꼽히는 김일 역시 그 소문을 확인했으며 역도산의 측근 레슬러 중 한 사람인 도요노보리를 비롯해 평소 친분이 있던 민단(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의 조녕주 전 단장도 역도산 본인에게서 그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1994년 11월 24일자 노동신문은 3면 특집기사에서 당시 역도산의 소식을 들은 김일성 주석이 북에 있는 그의 가족들을 잘 돌봐주도록 지시하는 한편 딸 김영숙을 일본에 보내 아버지와 상봉토록 했다고 보도했다.(역도산/"민족빛낸...-<한국일보> 1995년 2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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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역도산>은 무엇보다 실제 역도산과 딸 김영숙의 선상상봉을 목격했다는 인물의 인터뷰도 싣고 있다.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를 발행하는 조선신보사의 이정로 전 사장이 조선총련 중앙 니가타 출장소 수송과장으로 재직할 당시 총련 중앙본부 이심철 부의장이 전화를 해 와 "역도산이 니가타에 가니 승선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배에) 역도산의 가족이 와있다'는 내용이었다고 전한다.

이정로 전 사장에 따르면, 역도산은 이심철 부의장의 말대로 밤에 혼자 차를 몰고 니가타 항에 나타났다. 그 때가 1961년 11월이었다.(<영웅 역도산> 201쪽)

역도산은 선상에서 극비리에 큰형 항락과 딸 영숙을 만났는데 딸은 당시 열여덟이었다. 딸 김영숙의 말이다.

"저는 배에서 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배안에서 만났습니다. 아직 대학에 입학하기 전이었어요. 저는 어린 시절부터 몸이 컸기 때문에 그때까지 농구를 했습니다. 그 사실을 들으신 아버지는 조선 대표선수가 되라시더군요. 그래서 일본올림픽(1964년) 때 일본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체육대학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농구를 해보려고 결심했던 것입니다."(위 책 205쪽) 이날 김영숙은 어머니가 준비한 찹쌀과 고향의 산나물을 가지고 아버지와 눈물어린 상봉을 했는데, 아버지인 역도산에게 '내고향'이라는 노래를 불렀다.(<한국일보> 위 기사)

북한에서도 영웅이 된 역도산

전국민이 모두 일본인으로 알고 있는 '일본의 영웅' 역도산이 조선인인 것도 모자라 북에서 온 딸과 비밀리에 상봉한다는 것은 정상에 서 있던 그에게는 크나큰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애틋함도 더 크지 않았을까.

이정로 전 사장은 역도산이 그날 밤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고 떠올린다. 연락선 안에서 열린 역도산의 환영회.

"조선 인삼주를 마시고 기분이 좋아져 선원들 앞에서 가라테로 나무판을 잘라보이고, 모두들 좋아했지, 박수소리가 대단했어."

환영회를 마치고 이정로 전 사장은 니가타 근처의 히가시조우까지 역도산을 전송했는데 그가 자신의 차안에서 아리랑을 불렀다고 회고한다.

"아리랑을 불렀어. 기분이 상당히 좋았나봐. 자기도 조선인이라면서 몇 번이나 불렀지. 다른 조선노래도 불렀어."

이 전 사장은 역도산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한다.

"김일성씨는 대단해. 정말 대단한 아저씨야."(위 책 201쪽) 그로부터 다섯 달 뒤인 1962년 4월 역도산은 김일성 주석의 50세 생일을 맞아 최고급 승용차를 선물로 보내며 당시 1964년 개최예정이던 도쿄올림픽에 참가하는 북측 선수단의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약속했다.(<한국일보> 위 기사)

이순일이 북에서 만난 작가 이호인은 최고급 승용차를 선물로 보낸 사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역도산은 전국을 순회하는 김일성 수령의 현지지도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며 차를 보냈다더군요." 역도산은 선물과 함께 보낸 글에 "평화통일 역도산 김일성 원수만세 역도산 신락"이라고 덧붙였다고 이순일은 전한다. 이 글은 차와 함께 현재 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에 전시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위 책 192쪽, 207쪽)

1963년 1월과 그 이후 김일성 주석이 발표한 몇몇 교시에는 역도산에 대한 북의 평가가 집약돼 있다.

"역도산은 원래 함경도 사람입니다. 역도산은 레슬링, 유도 등의 적수를 누르고 지금은 세계적인 프로레슬링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 영화를 보고 있으면 민족적인 자랑과 자부심이 끓어오릅니다."(위 책 190쪽)

"일본에서 역도산의 인기는 대단합니다. 역도산은 처음에는 스모선수였으나, 스모를 아무리 잘해도 그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천거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역도산은 레슬링선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 역도산이 미국인을 패배시키는 장면은 정말 통쾌합니다. 나중에 간부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려고 하니 이 필름을 잘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위 책 191쪽)

역도산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1993년 1월 20일 김일성 주석은 딸 김영숙을 주석궁으로 부른다. 그는 김영숙에게 "아버지를 꼭 닮았다"면서 "역도산은 훌륭한 애국자였다"고 칭찬하고 "역도산이 조선사람이면서 일본선수라는 욕된 운명을 진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식민지통치가 빚어낸 후과"라고 말했다.(<한국일보> 위 기사)

한편 역도산은 1963년 1월 문교부장관 초청으로 남측을 전격 방문하기도 했지만 그해 12월 8일 도쿄 번화가의 나이트클럽 '뉴라틴쿼터'에서 한 야쿠자 조직원의 칼에 찔리고 그로부터 1주일 뒤인 15일 복막염으로 39세라는 짧은 생을 마감한다.

세상을 떠나기 전 특히 2, 3년간 그가 '통일의 메신저' 역할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고 그로 인해 미 중앙정보국(CIA)의 공작으로 암살당했다는 일각의 설이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통일의 메신저 역 하다 CIA에 암살당했다는 설도 나돌아

제작사로선 역도산의 삶을 일본인들에게 속시원히 보여주기가 꽤나 부담스러웠을 수 있다. 단적인 예로 1995년 1월 4일의 일을 들 수 있다.

그 해 4월 열릴 예정인 '평화를 위한 평양 체육 및 문화축전' 준비차 이노키 간지 참의원 초청으로 당시 박명철 북측 국가체육위원회 위원장의 부인이기도 한 역도산의 딸 김영숙이 이종혁 아시아 태평양 평화위원회 부위원장 등과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이때 스포츠신문 일부를 제외하고 일본의 중앙일간지들은 이를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역도산이 조선인이었다는 것과 생전의 북과의 두터운 친분과 교류가 알려지는 것을 일본인 유족과 일본언론들이 바라지 않는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다.(화 사상- <한겨레> 1995년 4월12일자)

아이러니하게도 역도산은 특히 일본 우익의 영웅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도 그의 기일인 12월 15일이 되면 도쿄 혼몬지의 역도산 묘에는 참배객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영화 <역도산>에는 화려한 액션이 없다. 송해성 감독의 장기인 생존을 위한 한 남자의 처절한 승부의 파편만이 건조하게 부서져 나간다. 하지만 역도산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승부로만 그리기엔 너무나 아까운 소재가 아닌가 싶다.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은 역도산의 죽음의 비밀과 그에 대한 평가. 영화 <역도산>은 한일합작 영화로서의 모양새에 맞게 패전 뒤 무기력과 좌절에 빠져 있던 일본에 활력을 불어넣은 전설적 영웅 역도산이 조선인이었음을 일본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한일합작 영화 <역도산>이 삼켜버린 그의 조국과 정체성에 대한 고뇌와 열정은 과제로 여전히 남을 것이다.

"나, 역도산. 내 운명쯤은 내가 결정한다."

불꽃같이 살다간 역도산의 영화속 대사가 뇌리에 남는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인터넷뉴스 자주민보(www.jajuminbo.net)에 2004년 12월30일 보도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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