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심청전>을 마치고 고향 회령에서 작품 구상을 하던 나운규는 시나리오를 완성하여 서울로 돌아 왔다. 나운규는 <농중조>(조선키네마프로덕션, 이규설 연출, 1926)의 주인공을 맡았고, 각색과 연출을 도우면서 자신의 감독 데뷔작을 준비했다. 제작비는 일본인 제작자 요도를 통해 마련했다. 일이 착착 진행됐다. 하지만 한 가지, 여주인공역이 마땅치 않았다. ▲ <아리랑>의 여주인공 신일선 그때 함흥에서 문수성 극단의 공연을 본 복혜숙(<농중조>의 여주인공)이 나운규에게 함흥에 노래와 춤을 잘 하는 여배우가 있으니 한번 찾아가 보라고 했다. 나운규는 함흥으로 15세의 어린 여배우를 찾아 갔다. 그 여배우는 나운규가 부산의 한 극단에서 보고 눈에 담아두었던 신일선이었다. 문수성 극단에서는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신일선을 내보낼 수 없었다. 매니저 격이었던 오빠 신창운과 단장 문수일 사이에 싸움이 났고, 급기야는 칼부림까지 일어났다. 이를 틈타 나운규와 신일선은 함흥을 떠나 서울로 도망쳤다. 신일선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아리랑>(조선키네마프로덕션, 나운규 연출, 1926년)에 출연하게 됐다. 그녀는 이 한편의 영화로 조선최고의 스타가 됐다. 신일선(1912~1990)의 본명은 신삼순으로 신용복의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동덕여학교에 재학중이던 그녀는 오빠 신창운의 강권으로 배우가 됐다. 3.1운동 당시 순사였던 오빠 창운은 3.1운동에 가담, 일경을 때려 구속되는데 한 친일인사가 양자로 삼으면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그러던 중, 창운은 조선극장에서 공연하던 조선예술가극단의 히로인 이혜경에게 반하게 된다. 그는 조선예술가극단의 이혜경과 관계를 맺고 싶은 생각에 빼어난 용모에 노래와 춤에도 소질이 있었던 막내 삼순을 극단에 입단시키고 자신도 매니저처럼 동생과 동행했다. 입단과 함께 삼순은 이름을 일선으로 고쳤다. 창운의 목적은 성공이었다. 이혜경과 가까워졌고 급기야 동거생활로 들어갔다. 단원들과 관객들은 수군거렸다. 이런 행동은 극단의 단결을 해쳤다. 극단에서는 부산공연의 실패를 이유로 신창운과 신일선을 내쫓았다. 신일선은 서울로 올라왔다. 학교에 다시 들어갔지만 동덕여학교가 아닌 혜화학원이었다. 배우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학교생활보다는 무대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했다. 오빠 창운에게 다시 무대에 서고 싶다고 고백했고 함흥의 문수성 극단에 들어갔다. 빼어난 용모에, 뛰어난 노래와 춤 솜씨, 신일선은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 <아리랑>에서 나운규와 신일선 <아리랑>은 엄청난 흥행과 함께 주연배우였던 나운규, 신일선을 조선 제일의 스타로 만들었다. 이 영화는 만들어진 뒤 10년이 넘도록 이 땅의 도시와 시골, 구석구석에서까지 상영됐다. 이후 민요 아리랑은 국민의 노래가 되어 전국에서 불렸고 토월회를 비롯한 여러 극단에서는 <아리랑>을 무대에 올려 공연하기도 했다. <아리랑>이 만들어진 1926년 한해, 신일선은 나운규가 만든 <풍운아>(조선키네마프로덕션)와 이경손이 만든 <봉황의 면류관>(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다. 1927년에는 <괴인의 정체>(김철산 연출), <들쥐>(조선키네마프로덕션, 나운규 연출), <금붕어>(나운규프로덕션, 나운규 연출), <먼동이 틀 때>(계림영화사, 심훈 연출)에 출연했다. 1926년과 27년, 두 해 동안 제작된 한국영화가 총 16편이었는데 신일선이 총 7편의 영화에 주연을 맡았다. 한마디로 신일선의 최전성기였던 것이다. 신일선의 인기가 넘치다 보니 이 16세의 소녀에게 몸이 달은 남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팬레터가 쌓이고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사람도 생겼다. <봉황의 면류관>을 만든 이경손도 가슴앓이를 심하게 했고, 박덕양이라는 사람은 짝사랑을 심하게 한 나머지 기관차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신일선은 1927년 음력 9월, 돌연 호남의 부자 양승환과 결혼했다. 그녀의 오빠가 연극배우 심영의 꾀임에 빠져 양승환에게 영화 출자금 명목의 거액을 받고 그녀를 시집보낸 것이다. 결혼은 결국 파국으로 끝났다. 결혼 3개월만에 양승환의 본처가 애를 안고 나타났고, 양승환은 미두에 손을 댔다가 사기꾼들의 농간에 빠져 전 재산을 날렸다. 신일선은 빈손인 채로 시동생 집에 얹혀 살게 됐다. 그녀는 1934년, 자살을 기도했다. 하지만 죽지 못했다. 그녀는 친정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남편이 없는 틈을 타 서울로 도망했다. 신일선이 다시 배우로 돌아왔다. 그동안 영화계도 많이 바뀌었다. 영화왕 나운규는 그 명성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우선 신일선은 레코드를 취입했다. 일본서 위문공연도 했다. 1934년 <청춘의 십자로>(안종화 연출)로 영화에 컴백했다. 이어 <은하에 흐르는 열정>에도 출연했다. 하지만 전국을 들썩이던 그 옛날의 인기는 회복할 수 없었다. 1936년, 나운규는 폐병에 시달리면서도 재기 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조선 최초의 유성영화 제작에 착수한다. <아리랑 3편>이었다. 이 작품에는 나운규와 그의 죽마고우인 윤봉춘, 마지막 애인인 현방란, 그리고 전택이, 신일선이 나왔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필우가 만든 <춘향전>에 밀려 최초의 유성영화라는 타이틀도 놓쳤고 흥행에서도 실패했다. 거기에 평단의 혹평에 시달렸다. 당시 매일신보에서는 "신일선의 재기는 석일의 발랄했던 신선미를 찾아볼 수 없음은 물론, 그 평면적인 연기도. 그래도 재기를 꾀하는 것이 일종 연민의 느낌을 주었다"고 혹평했다. 조선예술가극단 단장 문수일이 찾아왔다. 평양공연에 '신일선 무대출연'이라 허위선전을 한 것이 들통 나 극단이 해산직전에 몰린 것이다. 신일선은 과거의 인연을 생각해 평양으로 떠났다. 평양에는 그녀를 마중하기 위해 극단단원들이 역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신일선은 대본을 읽고 바로 무대에 섰다. 관객은 열광했다. 1937년 신일선을 스타로 만들어 준 나운규가 타계했다. 그 다음해 신일선도 연예계를 떠났다. 그녀는 짧게나마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남편이 죽어 자식들과 함께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째 아들이 군대에서 죽었고, 큰 아들이 출장간 사이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큰아들과도 헤어지게 됐다. 신일선은 피난 중 정착한 평택에서 행상을 하며 어렵게 살았다. 1957년, 나운규 타계 20주기를 맞아 <아리랑>이 리메이크됐다. 연출을 맡은 김소동은 신일선을 출연시키기 위해 신문광고를 냈고, 윤봉춘은 신일선을 만나 설득했다. 설득 끝에 그녀는 단역으로 <아리랑>에 출연한다. 그녀는 영화 출연을 계기로 헤어졌던 큰 아들과 만났다. 이후, 그녀는 식당을 하면서 어렵게 생활을 꾸려갔고, 몸이 좋지 않자 한 암자에 들어가 생활했다. 신일선은 대중의 기억에서 잊혀 진 채로 1990년,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