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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영어'를 제대로 아느냐

영화 <영어완전정복>

04.02.04 01:39최종업데이트04.02.04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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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맥스
연초부터 사시응시생들이 영어 때문에 골머리를 앓게 생겼다. 올해부터 사법시험 외국어 과목을 토익이나 토플로 대체하겠다는 발표가 있은 후, 사시응시생들이 집단 반발을 하고 나선 것이다.

혹여 신림동 고시촌에 때 아닌 영어 바람이 부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너도나도 살기 어렵다는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기꺼이 법전을 펼쳐 들었던 사람들도 영어를 배워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나라에 살게 되었다고 땅을 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정부의 이런 방침으로 더욱 공명정대한 법 집행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역시 영어는 한국인들에게 두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해야 ‘영어’를 잘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기사를 보면서, 반발에 동참하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무슨 참고서 가이드에서나 나올법한 질문이지만, 종로 어학원을 제 집 드나들 듯 하는 취업준비생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궁금증이 아닐까 싶다.

학창시절 무슨 자랑처럼 들고 다니던‘성문종합영어’를 다 떼고도 외국인 앞에서는 작아져야만 했던 한국의 교육 여건상 불가능한 일일까? 하긴 그 흔한 어학연수 한번 다녀오지 않고도 능숙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자신감이 치고 올라올 때가 있는 걸 보면, 분명 이건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그 해답은 알고 보면 무척 간단하다. 예전 내가 즐겨 들었던 라디오 방송에 강남의 잘 나가는 영어학원 원장이 패널로 나온 적이 있었다. 그는 자기소개를 해달라는 DJ의 부탁에 무슨무슨 대학교를 나왔고, 외국에서 몇 년간 유학 생활을 마치고 성공적으로 귀국했노라고 자신을 막힘 없이 소개했다.

때는 한창 수능시험이 본궤도에 올라 영어 구사 능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입시철. DJ가 그에게 이렇게 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어를 잘 하는 비결이 뭔가요? 나는 그의 노하우를 하나도 빠짐없이 듣기 위해 주의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들려온 그의 대답은 지극히 간단명료했다. 그냥 외우세요. 외우는 게 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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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허허롭게 웃어넘기기엔 그의 대답은 한없이 궁색하고 어설퍼 보인다. 그 말속에는 우리나라 영어 교육의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무조건적인 암기만을 강요받았던 학생들이 과연 영어를 제대로 말할 수 있겠는가?

사과를 보고‘Apple(애플)’을 떠올리지 않으면 뒤쳐지는 사회에 무작정 내던져진‘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라는 신조어)들이 고시에 매달리는 것도 모자라 영어실력까지 겸비해야 한다는 논리가 내 눈에 시기상조로 보이는 것도 이런 생각이 고개를 뻣뻣하게 쳐들었기 때문이다.

‘영어’ 열풍을 잠재우기 위한 감독의 복안이었는지는 몰라도, 김성수 감독의 <영어완전정복>은 제목이 주는 통렬한 이미지가 마음에 드는 영화다. 대한민국 공무원이 세계화의 바람을 타고 영어를 정복하러 나선다는 이야기의 신선함도 이 기대에 편승하고 나선다. 왠지 영어와는 담쌓고 지낼 것만 같은 공무원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도 말랑말랑한 다른 코미디 영화와 차별화 된 설정이 아니겠는가.

과다하게 부과된 전기세를 문의하기 위해 한 외국인이 동사무소를 찾아온다. 얼굴의 절반을 덮는 두꺼운 안경을 걸친 미모(?)의 9급 공무원에게 영어로 공손하게 물어봤음은 당연지사. 하지만, 평소 영어에 자신이 없던 그녀는 결국 대답을 못하고 말았고, 급기야 ‘친절 봉사’를 다하지 못했음을 시인한 그녀의 영어 정복기가 시작된다는 내용이 이 영화의 주요 줄거리다.

아쉽게도 <영어완전정복>은 등 떠밀려 시작한 영어지만 고생 끝에 회화를 마음대로 구사하는 공무원의 모습을 기대하던 관객들을 깡그리 외면한다. 시사회장에서 만난 김성수 감독은 “편안하게 찍고 싶었다”고 말했지만, 적어도 한국인의 ‘영어 콤플렉스’를 건드리겠다는 의도였다면 에둘러 가기보다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담았어야 옳다.

특히, 우리가 염원해 마지않았던 ‘영어 정복’의 꿈이 이야기의 또 다른 한 축인 사랑 이야기에 가로막혀 제대로 숨 한번 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제목이 주었던 통렬함을 까맣게 잊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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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가 영어를 배워야 하는지, 또 요즘 사회에 부는 영어 열풍이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지를 고민한 흔적이 보였더라면 영화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적어도 이 영화가 표방하는‘코미디’가 한층 도드라져 보이지 않았을까. 영어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사람들을 노렸던 얄팍한 코미디 영화가 개봉 후에도 빛을 발하지 못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소재의 참신함이 아까운 순간이다.

그나마 이 영화에서 사실에 기초했다고 생각되는 대목은 인물들마다 영어를 마스터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설정이다. 사실 다 같은 영어를 공부한다고 하더라도, 목적이 판이하게 다를 수도 있지 않은가. 영화에서처럼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는 낭만적인 포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취업을 위해 혹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영어를 수단처럼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건 사실이니까 말이다.

특히 요즘은 토익 점수가 안 나와 취직이 안 된다는 볼멘소리가 많은 때다. 시험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어려워진 만큼 따라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로 연일 학원가는 북새통을 이룬다. 이쯤에서 한번쯤 자신이 왜 영어를 배워야 하는지 생각해보면 어떨까.

‘영어’라는 것이 누군가에겐 정말 세계화에 발맞추기 위한 보람찬 준비일 수도 있거니와, 다른 누군가에게는‘취업’이라는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두 가지 경우 모두 영어를‘정복’해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알지만 실천하기는 무척 어렵기만 한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 오늘도 사람들은 그 목표에 가까이 가려고 영어공부에 매달리는지도 모를 일이다.
2004-02-04 10:35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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