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나이 마흔, 꽃이 아닌 향기로 지다

매염방의 유작 <남인사십 男人四十>

04.01.02 23:54최종업데이트04.01.03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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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포스터
ⓒ 부산국제영화제
나이 사십에 이르러 옛사랑의 소식을 다시 접했다. 이태백과 두보를 외우며 인간사를 초월한 듯 먼 곳을 바라보던 사람. 장강의 유장함 속에 깃든 선인들의 삶을 시로써 들려주던 사내. 고등학교 시절 학생들에게 문학적 감수성을 침투시켰던 남자. 스승과 제자로 만났지만 종내 연인으로 다가가고 싶었던 사람.

그녀는 동갑내기 남편에게 말을 건넨다. 다시 선생님을 만나야겠다고. 그를 위해 병간호를 해야겠다고. 이혼을 한 후 늙고 병든 초로의 몸으로 자신 앞에 나타난 옛사랑을 그녀는 외면하지 못했다. 자신의 스승이기도 했던 아내의 옛사랑. 남자는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번민에 빠진다.

고등학교 시절 남자는 자신이 짝사랑하는 같은 반 여학생이 국어 선생님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사춘기 여고생이 가진 연모의 감정이 아니었다. 국어 선생님은 한시를 좋아하고 공부에 뛰어났던 자신에게도 사랑을 쏟았다.

그러나 국어 선생님은 자신이 좋아했던 여학생을 한 생명의 어머니로 만들고 만다. 유부남이었던 선생님을 대신해 남자는 그 여학생과 함께 병원에 간다. 스물이 채 되지 않은 나이. 그 둘은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된다.

마흔에 이르기까지 동갑내기 부부의 일상은 평온했다. 그러나 불혹의 나이가 된 사십. 아내는 옛사랑의 소식을 듣고 결연히 집을 나선다. 남편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아픈 상처가 아물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어린 여학생을 보며 갈등에 빠진다. 자신 역시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 그를 남자로 보는 여학생에게 마음이 가기 시작한다.

<남인사십>은 마흔에 이른 동갑내기 부부의 모습을 담은 영화이다.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불혹에 접어든 남녀. 어느 날 각자의 인연들로 인한 마음의 파장에 일상의 평온함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에겐 과거에 지닌 열정이나 모험을 감수할 만큼의 과감함이 남아있지 않다. 인생에서 용감하게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닫게 된 나이가 된 것이다. 그리고 머리로만 외던 옛 선인들의 시가 삶의 구석구석에서 자신을 위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 영화 <남인사십>의 매염방
ⓒ 부산국제영화제
결국 부부는 아들을 데리고 스승이 있는 병원을 함께 찾아간다. 그 자리엔 생부가 누구인지 처음 알게된 남자의 아들도 있었다. 참으로 어색하고 난감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들에겐 함께 암송할 수 있는 두보와 이태백의 시가 있었다.

양강의 유장함을 노래한 선인들의 시 앞에서 인간사 기구한 인연은 소소한 물결보다 작게 느껴질 뿐이다. 병실에서 함께 시를 암송하며 각자 인생의 깊이를 반추한다. 스승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부부는 서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포옹을 나눈다. 장강의 무심한 물결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지난 12월 30일 홍콩의 여배우 매염방이 마흔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녀의 부음에 관한 기사를 읽다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남인사십>임을 알게 되었다. 80년대 홍콩의 아이돌 스타 중 한 명이었던 장학우와 함께 출연한 <남인사십>은 <객도추한>, <반생연>등으로 유명한 홍콩 뉴웨이브의 대표적 여성 감독인 허안화가 만든 영화.

2002년 부산국제영화제 월드시네마 부분에서 상영되었던 <남인사십>은 그 해 영화제에서 본 영화 중에서 매우 인상적으로 남았던 작품이었다. 조연이었던 매염방의 연기에는 인생의 풍랑을 헤쳐온 사람만이 가진 고요하지만 무심한 눈빛이 가득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로의 늙은이가 되어 병동에 누워있는 옛사랑이자 스승인 남자 앞에서 그의 마지막 길을 간호하는 매염방의 모습은 지나간 옛사랑의 회한을 감내하는 여자의 모습과 남편과 자식을 소중하게 여기는 평범한 주부의 모습 그 가운데 있었다. 그녀는 홍콩 가요계를 주름 잡았던 스타의 이미지나 여타의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감정의 과잉에서 벗어나 신산스러운 과거를 지닌 여염집의 아내로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사실 매염방의 영화를 많이 보거나 그녀의 노래를 좋아하는 팬은 아니었다. 그러나 <남인사십>을 통해 그녀의 연기를 다시 보게 되었고 서른을 넘어 마흔에 느낄 수 있는 삶의 과제와 그 느낌들을 유추해볼 수 있었다. 당시 영화제가 열렸던 11월의 부산, 그 바다 바람과 어울리는 쓸쓸함이었다.

▲ 그녀의 모습은 이제 영화속에서만 존재한다.
ⓒ 부산국제영화제
인생의 깊이를 차츰 알게 된다는 마흔의 나이. 한 때 화려한 꽃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고, 이제는 향기로 기억될 무렵 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녀의 부고 기사를 읽으며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유작 <남인사십>의 주인공은 분명 매염방이 아니라 장학우였다. 사실 남자 나이 사십에 겪을 법한 심리적 갈등을 표면에 내세웠기 때문에 매염방의 역할은 그렇게 주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남인사십>은 매염방의 연기로 기억되는 유일한 영화로 내게 남을 것이다. 나이 마흔을 주제로 한 영화를 유작으로 남기고 마흔에 세상을 떠난 그녀.

현실 속의 자신은 죽어도 영화 속의 인물로 자신은 영원할 것을 예감했을지도 모르는, 그녀의 인생 역시 또 다른 한 편의 영화가 아니었을까?
2004-01-03 10:39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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