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이건 복서 영화가 아니랍니다"

영화 <챔피언>

04.01.02 15:28최종업데이트04.01.02 16:31
원고료로 응원
ⓒ 엔터원
묘하게도 영화 <챔피언>은 흥행에 참패했다. 왜일까. 감독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챔피언>은 <록키>같은 복서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14라운드까지 가는 접전 끝에 맨시니의 카운터 블로우를 얻어맞고 숨진 김득구의 영화치고는 너무 싱거웠다는 관객들의 반응. 한국적인 느와르 영화의 종착역이 되 버린 영화 <친구>의 흥행. 다시 한번 흥행 타이틀을 지키려 했던 <챔피언>이 싸우게 될‘사각의 링’은 시나브로 좁아져 있었던 것이다.

영화 <챔피언>의 오프닝 장면은 꽤 인상적이다.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복서의 몸을 따갑게 내리치는 카메라 셔터. 금방이라도 훅 하고 불어올 것만 같은 대기실의 땀 냄새. 갑자기 환해지는 바깥을 노려보는 김득구의 눈을 따라 곧장 우리는 라스베가스 특설링으로 향하게 된다.

<록키>같은 여느 복서 영화들처럼 뚜렷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보다, 오로지 생존이라는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선 다윗처럼 훈련된 복서의 뒷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불안한 기운을 잡아채는‘들고 찍기’기법은 이 영화의 방향을 결정짓는데 효과적으로 쓰인다.

ⓒ 엔터원
이 부분은 김득구라는 복서가 왜 라스베가스까지 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들여다 볼 필요를 느끼게 하는 암시를 준다. 한없이 강해 보이는 그이지만 한편으로 두려워할 수 있다는 것. 그 가능성을 열어놓음으로써 김득구가 살았던 시대를 잘 모르는 관객들에게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친구>에서는 감독이 직접 겪었던 유년시절의 기억을‘폭력’과 ‘향수’를 통해 효과적으로 응축시켰지만, 이 때문에 많은 혹평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챔피언>에서 곽경택 감독이 던진 승부수는 바로 처절한 삶을 살았던 복서의 드라마를 세심하게 기록하는 일이었다. 마치 일기를 쓰듯 그의 삶 속에 틀어박힌 여러 인물들을 골라내는 작업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로 보여 진다.

혹자는 이 영화가 <친구>와는 다른 선상에 서 있는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챔피언>은 <친구>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알싸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상황 재현의 모티프가 있다. 긴 호흡을 가진 극적인 드라마는 없지만, 잊혀졌던 시대를 다시 환기시키는 전작의 장면들은 <챔피언>에 와서도 같은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 엔터원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챔피언>에서‘챔피언’은 없다. 다만, 챔피언이 되려는 강한 투지의 사내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 시대의 챔피언은 과연 누구인가?” 이 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팔이 세 개 달린 사람 봤나?”고 되묻는 득구의 순수함은 그래서 더욱 빛이 난다. 타고난 복서가 아닌 이상, 열심히 훈련하는 길만이 하루하루를 살게 하는 가장 정직한 인생이라는 것. 그것이 진짜 챔피언이 되는 길이다. 은연중 김현치 관장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사의 울림이 큰 까닭도 여기에 있다.

굳이 이 영화를 정의하자면, 김득구가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라스베가스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그는 어떻게 지냈으며, 또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사랑은 했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파헤친다. 실화를 영화로 만드는 작업은 어떤 의도로 만드느냐에 따라 다큐멘터리가 되기도 하고, 실제보다 더 드라마틱한 내용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사실 관객들이 궁금해하는 부분도 영화가 그리고자 하는 내용에 닿아 있다.

예컨대, 시합에서 이긴 뒤 샤워를 하던 득구가 “나는 행복합니다”를 되뇌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나 그의 아이를 가졌다고만 알려진 애인과의 러브스토리, 또 방황하던 득구에게 따끔한 충고를 하는 김 관장의 모습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일화들을 잘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그러나 <챔피언>은 이러한 에피소드의 나열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 엔터원
만약, 그가 살았던 시대가 걸치고 있었던 암울한 모습들을 좀더 리얼하게 그리고자 했다면, 단순히 소품이나 미술상의 철저한 고증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이야기의 감정선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간파하고 있어야 옳다.

그냥 맥없이 링 위에 쓰러진 김득구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것만으로는 비운의 복서를 추모하는 이상의 드라마를 끌어낼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고, 또 죽음에 이르기까지 강퍅했던 그의 인생이 현재의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에 대한 고민이 약하다는 말도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화 <챔피언>을 보면서, 그 시대를 떠올릴 때마다 무척이나 외로웠을 헝그리 복서를 기억해야 하는 아픔이 진하게 배어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종이 울리고 레퍼리의 시합 신호가 시작되면 잰 발걸음을 밟는 외로운 복서의 숨소리가 이토록 슬프게 들리는 영화가 또 어디 있겠는가.

덧붙이는 글 | <챔피언> / 감독 곽경택 / 주연 유오성 정두홍 채민서 / 2002
117분 / 12세 이상 관람가 / 엔터원

2004-01-02 16:09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챔피언> / 감독 곽경택 / 주연 유오성 정두홍 채민서 / 2002
117분 / 12세 이상 관람가 / 엔터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