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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론'과의 싸움은 끝나지않았다

[주장] 한국 사회에 떠돌고 있는 절대반지의 망령들

03.12.31 14:56최종업데이트04.01.02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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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라인시네마

절대반지를 둘러싼 반지원정대의 모험은 이제 막을 내렸다. 무언가를 쟁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버리기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떠나야 했던 반지원정대. 그들의 이야기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안겨주고 있는 걸까?

유령과 네티즌 그리고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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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에 길이 남을 최고의 전투장면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펠렌노르 평원의 전투. 펠렌노르 평원의 전투에서 사우론의 승리가 거의 확실시되어 가는 가운데 결정적으로 전세를 뒤엎은 것은 아라곤이 이끌고 온 유령부대였다. 중간세계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전투가 유령부대의 도움으로 매듭지어졌다는 점은 우리가 한 번쯤 되짚어 볼만한 부분이다.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단지 극적인 반전효과를 연출하기 위해 돌연 유령부대를 등장시킨 걸까? 아라곤이 사자(死者)의 길을 찾아가 내세웠던 것은 그들이 섬겨야 할 곤도르 왕국의 계승자라는 명분이었다. 이는 아라곤과 같이 그 시대가 가야할 길을 올바로 볼 수 있는 정신적 지도력만 갖추고 있다면 완벽하게 패할 것만 같은 싸움에서도 결국은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대를 대한민국으로 옮겨 지난 대선을 한번 떠올려보자.

당시 이회창 후보 진영은 거침없이 청와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회창 후보의 승리를 점치는 가운데 당시 노무현 후보는 같은 당 내부에서조차 완벽한 지지를 끌어내지 못한 채 고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에게는 아라곤의 유령부대와 같은 존재들이 있었다. 그다지 정치 의식이 강해 보이지도 않고 뚜렷한 실체도 파악되지 않던 20-30대 네티즌. 그들이 일어서기 시작하자 전세는 순식간에 뒤집히기 시작했고, 이회창 후보는 다 이겨놓은 거나 다름없었던 선거에서 재차 쓴맛을 볼 수밖에 없었다.

이회창 후보 진영에는 정치에 대한 참여의식이 약한 네티즌들이 허깨비처럼 무가치한 것으로 느껴졌을지 모르지만 바보스러울 정도로 타협을 거부했던 노무현 후보에 있어서는 네티즌들이 거대한 지지세력으로 드러나, 질 것만 같은 선거를 역전시키는 실제적인 힘을 발휘해 주었던 것이다.

사우론과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우론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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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프로도와 샘에 의해 절대반지는 파괴되었지만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아직도 사우론과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사우론(Sauron)의 이름은 saurian(도마뱀류의 동물)의 발음과 닮았다. 도마뱀의 꼬리가 쉽게 잘려나가 힘을 잃은 듯이 보이지만 금세 다시 자라나는 것처럼 사우론 역시 반지를 끼고 있던 손가락은 잘려나갔지만 절대반지가 파괴되기 전까지 끈질기게 되살아나 중간세계를 위협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와 같이 절대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는 법이다. 주인공인 프로도조차도 절대반지를 파괴해야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지 않았던가. 아마도 톨킨은 그러한 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사우론의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도 사우론과의 지루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듯 하다. 사회 곳곳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있는 박정희의 망령과 더불어 5, 6공 독재세력에 기생하며 힘을 보탰던 인물들이 변함없이 권력을 휘둘러대고 있으니 말이다.

운명의 산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마지막 관문 거미

절대반지를 파괴하러 가는 길을 가로막는 마지막 관문에 '쉴롭'이라는 거미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타란툴라(거미)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놓았다. 여기에서 니체는 타란툴라를 ‘평등을 설교하는 자’라고 언급하며 무조건적인 평등사상을 비판한다.

만인이 평등하다고 하는 성경의 사상을 기초로 하는 평등주의는 절대권력에 희생당했던 사람들에게는 꽤나 매혹적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마치 그것만 이루고 나면 절대권력을 없애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역사가 증명을 하고 있듯이 공산주의에서 추구한 무조건적인 평등주의는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린다. 프로도가 거미줄에 돌돌 말려 시체처럼 굳어버렸던 것처럼 인간의 정신을 파괴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물론 인류가 확고히 이루어 놓은 유산을 누리는 권리에 대해서는 평등이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어내는 모든 과정에 무조건적인 평등만을 강조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타란툴라의 먹잇감이 되는 것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위기 때마다 나타나는 독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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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 반지원정대>에서 사루만과의 대결 끝에 죽음의 위기에 처한 간달프를 극적으로 구해냈던 거대한 독수리는 <왕의 귀환>에서도 검은 문 앞에서 “반지원정대”가 위험에 처한 순간 나타나 와이번(날아다니는 용)을 무찌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독수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왜소해 보이지만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순간 거대한 몸집과 힘을 드러낸다. 인간이 펼칠 수 있는 엄청난 잠재능력, 니체는 그것을 독수리로 묘사하였다.

날개를 웅크렸기 때문에 왜소해 보였던 독수리처럼 어찌 보면 인류발전에 장애물이 될 것만 같은 '미약한 사회의 약자 또는 인간사회의 허약한 부분'에서부터 인간의 무한한 능력이 펼쳐지게 된다는 것을 니체는 강조한다.

 나즈굴의 대장을 물리친건 용맹한 기사가 아닌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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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도 모든 능력을 겉으로 드러내고 있는 아라곤과 같은 영웅적 인물들은 시간을 벌기 위한 전투에 참여했을 뿐, 절대반지를 파괴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프로도와 샘이었다.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고 인간에 의해 죽지 않는다는 나즈굴의 대장 역시 호빗족 메리와 사회적 약자에 해당하는 여성(에오윈)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나치와 같은 제국주의자들은 이러한 니체의 사상에서 '잠재적 능력의 팽창'이라는 부분만을 악용하여 오로지 강자만이 살아남는 억압적 경쟁논리로 둔갑시켜 버렸다. 같은 맥락에서 60-70년대 박정희가 주도한 성장 중심의 경제정책 역시 강자만을 키워내고 약자를 억압하는 경쟁논리를 기반으로 개발독재의 어두운 신화를 만들어냈다. 나즈굴이 타고 다니는 와이번(날아다니는 용)은 독수리와 대조적으로 그러한 사악함을 보여주는 신화적 상징물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만한 부분은 독수리가 나타나기 전에 홀연히 등장하는 나방이다. 나방은 언제나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빛을 따라가는 존재이다. 간달프가 최악의 궁지에 몰려 절망에 빠져있을 때마다 나방은 희망의 빛을 찾아내 주었다. 물론 그 빛은 인간의 잠재능력을 상징하는 독수리이다. 프로도와 샘이 절대반지를 파괴한 뒤에 운명의 산 분화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용암 속에서 구출된 것 또한 독수리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사회의 희망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작고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중간세계의 희망은 그들에게 달려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희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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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절대권력과 경쟁의 논리를 버릴 수 있는 힘이 '인간의 무한한 잠재능력'에서 나온다는 것과 그러한 잠재능력은 잔뜩 웅크리고 있는 왜소한 독수리나 난쟁이 호빗족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게서 찾아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 사회의 약자가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날, 그리고 언젠가 그들이 대한민국 곳곳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사우론의 망령, 절대반지를 파괴하게 되는 날을 기대해 본다.

톨킨이 제시한 호빗족의 삶

그렇다면 톨킨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걸까? <반지의 제왕>의 주인공인 호빗족은 그것을 잘 드러내준다.

춤추며 노는 것을 즐기며 하루에 여섯 끼씩 먹어낼 정도로 식성이 대단한 호빗족은 권력이나 경쟁과는 거리가 먼 종족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호빗족의 습성을 살피다 보면 톨킨이 'hobby'라는 뜻을 염두에 두고 'Hobbit'이라는 종족의 이름을 지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호빗족은 히틀러의 나치를 연상시키는 나즈굴(Nazgul)과 대조적이다. 나즈굴처럼 절대반지를 추종하는 세력이 경쟁을 통해 상대방을 짓밟고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며 지배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면, 호빗족은 경쟁이 아닌 자기 만족을 중시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대량 산업사회의 공장을 연상시키는 모르도르와 여가를 즐기며 사는 샤이어와의 단순비교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아라곤의 왕위 즉위식에서 프로도와 그 친구들에게 모든 이들이 경의를 표하는 장면에서 비틀즈를 떠올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건 단순히 넷이라는 숫자가 일치하기 때문이 아니라 톨킨이 제시한 호빗족과 같은 삶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대반지'라 할 수 있는 거대한 부와 명예까지 거머쥔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비틀즈이기 때문이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호빗족이 중간세계를 구했듯이, 노동자 출신의 멤버로 이루어진 밴드인 비틀즈가 당시 두 번의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났던 영국경제력을 다시 일으키는데 큰 몫을 담당했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행사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호빗족의 여유로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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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몰락시키는 경쟁을 통한 밥그릇 싸움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일에 충실하며 부와 명예를 창출해 낼 수 있는 사회. 호빗은 톨킨이 원하던 그런 사회의 주인공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삶을 강조하고자 하는 노력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온몸에서 땀이 배어나올 정도로 박진감 넘쳤던 전투장면 직후에, 상대적으로 길게 느껴질 정도로 '일상적인 호빗족의 삶'을 차분하게 그려낸 것은 그만큼 호빗족과 같은 삶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려는 감독의 의도가 담긴 장치가 아니었을까?

톨킨이 제시한 호빗족과 같은 삶이란 일상생활에서 스스로 원하는 일을 하며 기쁨을 누리기 위한 것이지, 특정한 날에 잠시 잠깐 누릴 영광과 명예를 위해 희생하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과거 개발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풍요로운 삶을 미끼로 대다수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해왔다. 그렇다면 시간이 흐른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일상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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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시리즈는 막을 내렸지만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절대반지의 망령들과의 싸움은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EANC English Center(http://www.eanc.co.kr)의 류성완, 손정민 선생님과 공동 작업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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