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앗, 안경을 두고 왔어요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극장 관람, 근시 앞에 좌절된 사연

03.11.25 00:25최종업데이트03.11.25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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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원동화
그동안 꼭 보겠다고 다짐했었던 영화들을 비디오로 빌려보는 중이다. 이것은 물론 극장에서 보는 것과 달리 빨리 감기와 되감기 버튼을 이용해 마음대로 영화 속으로 유영할 수 있다는 비디오의 장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내 지독한 근시 탓이다.

근시에 관한 나의 추억은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 그 흔한 렌즈 하나 없는 나로서는 반드시 안경을 착용해야만 했었는데, 그 모습 또한 대외적으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로 고등학교 때부터는 아예 안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사물을 보지 않으면 아무 것도 분별할 수 없었지만 무슨 고집에서인지 끝까지 안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모처럼 점찍어 놓은 영화를 보기 위해 친구들을 잔뜩 대동하고 간 극장 앞에서 미처 안경을 챙기지 못해 들어가지도 못할 때의 그 막막함이란….

그런 연유로 보지 못했던 영화 중 하나가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다. 우연히 대학교 1학년 때 그의 작품을 볼 기회가 있었지만 지지리 운 없게도 안경을 미처 챙기지 못해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국내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는 방법은 불법으로 복사된 테이프에 의한 감상이 대부분이었다. 이우 나는, 다시는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을 볼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지레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 대원동화
그러나 때는 2002년, 정확히 월드컵의 열기가 전국을 강타하던 6월, 나는 그 뜨거움과는 관계없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개봉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극장으로 내달렸다.

광화문과 시청 앞으로 몰려 나간 사람들 때문인지 극장은 무척이나 한산했다. 종로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나는, 일이 끝나자마자 온통 거리를 붉게 물들이는 행렬에 휩싸이는 불운한 사태에 직면하고 말았다. 그 인파를 헤치고 나아가려던 내게 모아지는 사람들의 시선. 결국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하나가 되어 광화문까지 가고 말았다. 아, 대한민국!

ⓒ 대원동화
어쨌든 힘들게 보게 된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과연 재미있었다. 짜증 잘 내고 칭얼거리기 좋아하던 열 살짜리 소녀 치히로가 돼지로 변해버린 부모를 되찾기 위해 갖가지 신들이 다녀가는 온천장으로 들어설 때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열 살 때 과연 나도 치히로같이 순수했을까.

치히로는 온천장의 주인인 유바바의 구박을 받지만 그의 수하 하쿠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열심히 일한다. 마녀 유바바는 치히로에게 온천장에서 일하는 조건으로 ‘치히로’라는 이름 대신 ‘센’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준다. 마을 밖은 이미 바다로 변해버렸고, 한번도 해보지 않은 온천장의 험한 일들을 어렵게 해나가면서 치히로는 조금씩 성숙해져 간다.

예전에 보았던 <고양이의 보은>처럼 이 영화는 어린 소녀가 겪게 되는 성장기의 진통을 재미나게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온천’이라는 일본의 전통문화를 빠르게 이해해야만 하는 부지런함이 없어도 많은 사람들이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한 미야자키의 배려는 마땅히 칭찬해도 좋을 듯하다.

ⓒ 대원동화
미야자키 하야오가 발표하는 작품들은 자연과 인간의 첨예한 대립을 주제로 한 것들이 많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오물을 뒤집어 쓴 신의 옆구리에 박힌 쓰레기를 치히로가 뽑아 주는 장면이었다.

인간들이 버린 쓰레기는 오물이 되고, 강을 따라 흘러 미처 닿지 않는 세계에서는 아름다운 강의 신을 오물의 신으로 둔갑시키기도 한다. 아이들용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곤란한 구석이 많은 것도 이처럼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은 아닐까.

상상할 수 없는 낯선 세계에 던져진 치히로는 돼지로 변해버린 부모님을 되찾기 위해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는 담대함과 용기를 보여준다. 치히로의 친절한 말과 행동은 윤색을 덧붙이지 않고도 올바른 자의식을 찾아가려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교재다.

그러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면서 예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후회가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큰 스크린과 TV 화면의 간극은 어쩔 수 없이 생기기 마련인지라, 그 때 봤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는 지금이라도 열심히 극장에서 볼 영화들을 다시 한번 꼽아봐야겠다.
2003-11-25 09:19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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