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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이라는 진통제, 그 약기운에 취하다

<태양은 없다> 90년대를 이야기하는 '쿨'한 영화

03.10.16 00:38최종업데이트03.10.16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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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맥스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 또 얼마 만큼의 목표를 세워야 하는가. 스무 살을 넘기 전까지 고민해 보지 못했던 일들이 하나둘씩 쌓일 때마다 드는 생각. '아, 내가 벌써 이만큼 커버렸구나.' 이런 것들을 스스로 정하다 보면 어느새 함정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김성수 감독의 <태양은 없다>는 <비트>의 방황하는 청춘들이 흘러 들어와 실력이 따르지 않는 권투를 하겠다고 무작정 덤비거나 60억짜리 건물을 사기 위해 끊임없이 한탕을 꿈꾸는 영화다.

삼류 복서 도철(정우성 분)은 선수로서 한물 갔다는 주위의 만류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또, 불륜 사진을 찍어 돈을 버는 흥신소 직원 홍기(이정재 분)는 사채를 갚지 못해 대로변에서 쫓기는 신세를 면치 못한다. 그러나 뚜렷한 목표 없이 허름한 곳에서 같이 사는 도철과 홍기의 표정에서는 그늘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평범하지 않는 꿈을 꾸고 있는 이들은 실제로는 너무나도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그런 이들의 삶에 불쑥 끼어드는 미미(한고은 분)도 스타가 되길 꿈꾼다. 비록 음료 홍보 도우미를 하는 처지이지만 언젠가 배우가 되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은 잡지나 드라마에서 멋진 모습을 하고 있는 스타를 그대로 따라 해야 직성을 풀리는 요즘 아이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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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젊음'이라는 진통제 앞에서 도철은 권투 글러브를 다시 조여 매고, 홍기는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한 번쯤 기회가 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매우 위태롭다.

펀치 드렁크에 걸린 도철의 주먹은 돈을 갚지 못한 채무자들에게나 통하는 물렁한 신세를 면치 못한다. 또 홍기는 한탕하기 위해서 보석상을 터는 막다른 골목 안으로 들어서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자기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서 빠져나올 줄 모르는 이유. "얼마나 복싱이 옳은 것인가를 내 자신에게 보여 주려는 것뿐"이라고 항변하는 도철의 대사처럼 바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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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인 <비트>에서 10대 후반의 주인공들이 펼치는 청춘과 세상의 인식에 관해 이야기했던 김성수 감독의 관심은 <태양은 없다>에서 제한된 시간대에 머물고 있는 고독한 젊은이들의 통과 의례로 옮겨간다. 수많은 영화들에서 변주되거나 변용되어온 소재는 자칫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는 무거움과 가벼움의 경계 사이를 지나 새로운 '버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서 방황하는 도철과 홍기는 때로는 서로에게 의지하고 때로는 서로를 배신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계층과 신분의 차이 앞에서 무릎을 꿇기도 한다.

돈을 받기 위해 찾아간 채무자와 그의 노모를 보고 도망쳐 나온 그들은 한없이 나약해 보이기까지 한다. 도시에서의 좌절감과 상실감을 느낀 그들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없다는 거, 이제 알았어"라고 체념하면서 찾아간 바다에서 잠시 해방감을 만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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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태양은 없다>가 보여주는 쾌감은 60년대 어두웠던 청춘들의 비극에서 벗어나 역설하고 있는 희망이 '쿨'하게 그려져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성격이 다른 두 주인공의 굴절된 내면 심리를 현란한 카메라 영상에 담아낸 것도 불안정한 90년대의 젊은이들을 이야기하는 숨은 '화법'일 수도 있겠다.

또한, 소외된 이들이 엮어가는 위태로운 일상의 무게는 관객들에게 돌아갈 때에 엄청난 하중으로 늘어난다. 더 이상 달아날 곳 없는 비좁은 옥상은, 도철과 홍기가 태양과 마주설 수 있는 공간을 상징한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끝까지 해낼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진정한 청춘들이 아닐까. 차가운 현실 속에서 발견한 현실에 대한 타협점은 이렇게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떠나는 여행이 마음을 풍요롭게 만드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2003-10-16 11:08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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