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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존재할까?

<중독> 사람과 사람을 움직이는 마음의 바탕

03.08.26 23:57최종업데이트03.08.27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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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네서울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존재할까? 영화 <중경삼림>에서 홍콩의 어두운 밤거리를 배회하는 경찰 223은 데미 무어를 닮은 애인을 잃은 상실감에 유통기한이 5월 1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먹어치우고, <세렌디피티>에서 자신들의 운명적인 사랑을 절실하게 믿고 있는 조나단과 사라에게 7년간의 유예기간이 주어진 끝에 사랑을 완성하는 과정을 보노라면 분명 영화 안에는 사랑의 유통기한이 존재하는 것 같다.

얼마 전 읽은 의학책에 따르면, 사랑의 유통기한은 상대방이 누구이건 간에 뇌 속에 세로토닌이 다 없어지는 2년동안이라고 못박아놓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이러한 의학적 사실만으로 사랑의 유통기한을 결정짓는다는 것은 어찌보면 굉장히 무모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알 수 없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감춘 채 유유히 유영하는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라 해도 사랑은 그 사람을 움직이는 마음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군에서 막 제대할 무렵에 나는 우연히 ‘동창 찾기’ 사이트를 통해 초등학교 때 짝꿍을 만나게 되었다. 또래의 짓궂은 남자아이들처럼 서로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불평등한 금을 긋고 “넘어오면 한 대씩 맞는 거야”라고 말도 안되는 규칙을 남발하던 녀석이 뭐가 궁금했는지 12년 전의 짝꿍은 동창의 동창을 거쳐서 무척이나 나를 만나고 싶어했다는 소식을 미리 전해들은 후였다.

ⓒ 씨네서울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시간을 훌쩍 넘어 오래전 순수했던 마음들을 지나 서로에게 궁금해야 할 것들은 잠시 접어두고 녀석이 보자고 했던 영화가 바로 <중독>이었다.

직장을 다니면서 편입을 준비한다는 그 애의 껑충한 커트머리가 왠지 모르게 푸근하게 느껴졌다. 중학교 진학을 앞둔 어느 날 머리를 자르고 온 그 애의 모습이 머리 속에서 강하게 인써트되면서, 낯설어 하는 그 애 앞에서 기억해내지 않아도 될 말들을 주워섬기고 있었다.

영화 <중독>의 은수(이미연 분)과 대진(이병헌 분)의 관계는 생경하기만 했던 우리의 만남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카레이싱을 하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대진은 같은 시간 사고를 당한 형 호진의 영혼이 몸 안으로 들어왔다고 이야기한다.

흡사 시간과 공간을 무시한 듯 보이는 대진의 자아 정체성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은수와의 재결합으로 완성된다. 예전의 자기가 그려놓은 모습들을 환기하는 과정은 그 사람을 결정짓는, 혹은 정의하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 씨네서울
그러나, 어릴 적의 천둥벌거숭이 같았던 나를 몹시 좋아했었노라고 고백하는 그 애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곳에서 나란히 눈 흘기며 장난치던 친구가, 적어도 나한테는 여자가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추억을 위반하는 불경한 것이라고 자위하고 있었던 내 지난날의 깜냥 때문이었다.

그 애와 함께 본 <중독>은 한동안 시니컬했던 내 성격을 강하게 뒤흔들어놓는 힘이 있었다. 형 몰래 단단히 숨겨두었던 사랑 때문에 신음해야 했던 대진이 죽은 형의 유골을 흩뿌리면서 되뇌는 대사는 무언가로 뒤통수를 내리치는 둔탁한 저음이 머리 속을 쾅쾅 쳐대는 것 같아 시종일관 불안했다.

어쩌면 그 애를 만난 것이 못내 가만히 두어도 될 물건을 들쑤셔 놓은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지만, 적어도 서로가 느끼는 유통기한은 감정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 애가 느꼈던 감정들에 대해 누군가가 일찍이 나에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의 유통기한을 말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만 같다. 물론 대진이 형수에게 느끼는 위험한 사랑의 감정만큼 중독성 강한 것이라면 대환영이다.
2003-08-27 08:54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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