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거울가면에 비친 자 죽음을 맞으리라

피토프 감독의 <비독>

02.01.06 16:08최종업데이트02.01.08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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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헐리우드 영화에 밀리지 않는 자국 영화시장을 가진 나라는 드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자국영화 점유율 50%선에 다가서는 등 한국영화 열풍입니다만, 그건 근래의 일이죠. 최근 프랑스 영화계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현상을 보인다고 합니다. 2001년 개봉한 <늑대의 후예들>이 흥행돌풍을 일으킨 이후, <비독>으로 자국영화 점유율 50%를 넘어서는 기염을 토했다는군요.

이렇게 열풍을 일으킨 영화들을 보자면 대작들인 경우가 많죠. 우리나라의 영화흥행열풍 시작점인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 등은 이전의 다른 영화에 비해 제작비, 마케팅 비용 등이 월등히 많이 들어간 작품이었습니다.

이는 프랑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늑대의 후예들>의 특수효과와 올스타 캐스팅, 고증을 거친 화려한 시대극 의상 등은 헐리우드물에 익숙한 프랑스의 젊은 관객을 열광시켰죠. <비독>은 그 연장선상에 서있습니다. 프랑스의 옛날 이야기에 헐리우드식 스펙터클을 덧입히는 거죠. 헐리우드물을 이기기 위해 헐리우드식 볼거리를 차용해야한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18세기, 파리에 정체불명의 거울가면을 쓴 살인마가 나타납니다. 이 살인마를 뒤쫓는 비독은 예전엔 고관들의 집을 골라 터는 도둑이었지만, 경찰에 투신하였다가 현재는 사립탐정으로 나선 독특한 이력의 사내입니다. 거울가면의 뒤를 쫓던 비독은 그만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져 죽고, 비독의 추종자인 신출내기 기자 에티엔느는 비독의 전기를 완성하기 위해 그 의문사의 비밀을 파헤칩니다.

에티엔느는 사건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지만, 비독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 사람은 차례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살인마의 거울가면에 얼굴이 비친 자는 영혼을 빼앗겨 죽게된다는 말을 남긴 부인도 거울가면에게 죽임을 당하지요.

영화 속의 파리는 비누와 하수도가 보편화되기 이전 유럽의 모습입니다. 돌이 깔린 좁은 길은 거미줄처럼 엉켜있고, 그 가운데로는 오수가 흐르죠. 사람들의 얼굴엔 땟국물이 흐르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습니다. 아직 정치적으로 불안한 파리 곳곳은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고 사람들은 폭동을 피해 이리저리 몰려 다닙니다.

한쪽에선 전기와 피뢰침을 이용한 과학실험을 하고 다른 한쪽에는 영원한 젊음을 위한 비법의 가루를 바르는 늙은이들이 서있군요. 도깨비처럼 차린 창녀와 남창들이 즐비한 거리와 아편굴도 있고 거울가면으로 사람의 영혼을 빨아들이는 살인마도 있습니다. 이렇게 근대와 중세가 뒤섞인 환락의 소돔같은 파리는 사람을 벼락으로 죽이고 젊은 여자의 피를 뽑는 살인마가 나타났다 해서 이상할 것 하나 없어 보이는 그런 곳입니다.

피토프 감독은 <잔다르크>, <에일리언4> 등에서 특수효과와 시각효과를 맡은 경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영화는 그의 감독 데뷔작이지요.
망토로 온 몸을 가리고 얼굴엔 거울가면을 쓴 살인범이 이리저리 날 듯이 뛰어다니며 비독과 겨루는 장면은 탄성을 내뱉을만 하고, 18세기 파리의 뒷골목과 화약공장, 유리공장, 지하미로, 아편굴 등의 묘사와 등장인물들의 의상은 훌륭합니다. 프레아가 짧게나마 보여주는 샴 댄스와 세 남자를 화장시켜주는 장면은 화려하면서도 예쁘고, 거울가면의 본거지는 음침한 악마의 소굴답습니다. 거기서 겨우 빠져나온 벌거벗은 소녀의 비주얼은 또 얼마나 끔찍한가요.

그런데 거기서 더 나가질 않는군요. 감독이 자신의 특기를 살린 덕에 화려한 액션과 특수효과는 가히 일품이지만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거울가면이 살인을 한 이유는 비독이 자신의 정체를 캐러다니며 희생자들에게서 정보를 얻었기 때문인가 본데, 처음 셋도 그렇지만 그가 죽인 사람들은 거울가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살려두어도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귀찮게 사람들을 죽이느니 그냥 자신의 근거지를 옮기는 편이 훨씬 손쉬웠겠지요. 그 복잡한 파리라면 다른 곳에서도 소녀들을 끌어오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을테죠.

거울가면이 사람을 죽여가면서까지 소녀들을 끌어 모은 이유는 뭐죠? 영원한 젊음을 위해서? 그런 것에 연연할 나이로는 보이지 않던데요. 하긴 젊어서부터 가꾸겠다는 생각이었다면 할 말은 없지만, 어쩌면 그런 설명 한마디 없었던 걸까요. 다른 일에는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면서.

의협심이 강해보이지도 않는 비독이 목숨을 걸고 거울가면을 잡으려 드는 이유도 모르겠고, 비독의 옛날 상관의 정체도 알쏭달쏭해요. 난교 파티에서 놀던 사람이 명탐정 흉내를 내다가, 나중엔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행동하고요.

나름대로 과학적으로 범인에 접근하던 영화가 말미에 거울가면에 붙잡혀 있던 죽은 자들의 영혼이 풀려나는 장면을 보여주며 신비주의로 흐르는 것도 어색해요. 처음에는 펄펄 날던 살인마가 이때는 그냥 퍽퍽 당하고 마네요. 그 거울이 붙은 막다른 방엔 어떤 힘이 있어서 살인마를 그렇게 괴롭히는 걸까요. 그 가면은 어떻게 죽은 자들의 영혼을 붙잡고 있었던 걸까요. 궁금한 것 투성이네요.

비독은 실존인물입니다. 100여 차례가 넘게 부패한 귀족과 관리들의 재산을 약탈해서 평민들에겐 의적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흉악범만 투옥하는 바스티유 감옥에서 60여 차례나 탈옥하는 대기록에 변장술도 대단하고 두뇌회전도 빠른데다 완력도 강했다고 하네요. 나중엔 탈옥범에서 벗어나 경찰에 투신해서 활약하다 사립탐정으로 활동했다는군요. 또 파리 경시청의 설립멤버였다고 합니다. 말년에 자신의 일생을 다룬 <회고록>을 집필해서 탐정소설의 효시가 되었고요. 누군가 떠오르지 않으세요? 예. 괴도 뤼팽이요. 모리스 르블랑의 '뤼팽'은 비독에게서 영감을 받은 인물이라고 합니다.

이런 드라마틱한 실존인물의 이야기가 든든하게 받치고 있었는데도 화려하기만 하고 스토리는 흔들거리는 이런 영화를 만들어 놓다니, 피토프 감독은 모리스 르블랑을 제대로 벤치마킹하질 않았나 봅니다. 다음에는 시각효과에 신경 쓴 만큼 시나리오에도 신경을 쓴다면 좋겠어요. 헐리우드 블럭버스터를 이기기 위해 그들의 전법을 차용한다고 하더라도 드라마가 약한 약점까지 닮아서야 되나요.

덧붙이는 글 | 반응이 시들한지, <반지의 제왕>에 밀렸는지, 부산엔 이틀만에 이 영화를 철수한 상영관도 있습니다.

2002-01-06 16:05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반응이 시들한지, <반지의 제왕>에 밀렸는지, 부산엔 이틀만에 이 영화를 철수한 상영관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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